아찔했던 순간
아찔했던 순간
  • 금산중앙신문
  • 승인 2019.02.0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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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前 부여군 부군수)

한참 전에 있었던 아찔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날 외출을 했다가 오후에 집에 돌아오니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아들은 일본에 가서 생활하니 아예 없고, 딸은 아침에 직장에 나갔고, 집사람은 목장예배 간다더니 아직 안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날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제법 많이 걸었던 탓에 출출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어제 먹던 닭발이 생각나 주방에 들러 작은 들통뚜껑을 열어보니 삶은 닭발이 제법 들어 있었다. 출출한 참에 막걸리 한잔 곁들여 먹으면 딱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닭발만 먹기는 좀 그렇다.)

우선 들통에 삶은 닭발이 들어 있는 사연부터 얘기해본다. 아주 심하지는 않지만 오른쪽 무릎이 가끔 시큰거릴 때가 있다. 이러다 가까운 산조차 오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하던 어느 날, 고향친구가 “닭발에 우슬뿌리를 넣고 삶아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해줬다. 우슬도 좋지만, 닭발에 콜라겐이 많아서 연골에 좋다는 것이었다. 자기 부인이 무릎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우슬과 닭발을 삶아먹고 효험을 봤다고도 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집사람과 유성장에 갔던 길에 닭발과 우슬을 사다가 삶아놓고 며칠째 그렇게 먹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가지고 온 생 닭발 3kg 중에 우선 절반 정도만 삶아놨는데도 양이 잘 줄어들지가 않았다. 닭발 생김새가 좀 험해서 그런지 딸은 먹기는 고사하고 처다 보려고 조차 하지를 않았다. 집사람도 삶아는 줘도 아예 먹지를 않았다. 나는 그래도 닭발에 소금을 찍어 먹으면 쫀득쫀득하고 고소해서 제법 먹을 만 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리 약으로 먹는다 해도 하루에 먹는 양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 몇 개만 먹고 그만두고 했던 것이다.

또 닭발을 여러 번 삶으면 점차 흐물흐물해져서 쫀득한 맛이 덜했다. 그래서 그날 출출한 참에 닭발을 제법 많이 먹어치우려고 작정했던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나는 또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집에서도 가끔씩 마신다. 그래서 그날 막걸리를 사러갔던 것인데 사달이 난 것이었다.

그날 닭발이 들어있는 들통 속에 물이 제법 흥건했다. 인덕션에 들통을 올려놓고 집 앞의 마트에 가서 얼른 막걸리 한 병을 사올 동안이면 닭발이 다 끓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트로 가는 도중에 송금을 해야 할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송금한다한다’하면서 깜박하고는 했는데, 하필 그때 생각이 난 것이었다. 계좌번호는 핸드폰에 이미 저장하고 있었고, 금액은 많지 않은 두 달 치 신문대금이었지 않나 싶다. 생각난 김에 잠깐 계좌이체를 하고, 막걸리를 사 가지고서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웬일인지 농협-농협은 지상으로도 연결되는 2층에, 마트는 지하층에 있다-의 자동현금출납기마다 볼일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한 대는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순서를 기다려야 했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겨우 송금을 하고 입금사실을 알리는 문자까지 넣고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막걸리 사는 것은 깜빡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치 불이라도 난 듯 거실에 검은 연기가 자욱하고, 주방 쪽에서 탁․탁․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급히 주방에 가서 들통뚜껑을 열어보니 물은 졸아서 하나도 없고, 닭발들이 엉겨 붙어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재빨리 인덕션 전원을 끄고 들통을 내려놓았다. 인덕션은 가스레인지와 달리 전원을 꺼도 밑바닥에서 한동안 열을 내기 때문이다.

이어서 앞뒤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지만, 연기는 쉽사리 빠지지 않고 거실에 가득했다. 후유! 하면서도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진땀이 났다. 한편으로 전기를 사용하는 인덕션의 화력이 그렇게 쎈 줄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약하게 하듯 인덕션의 화력세기를 약하게 놓고 나갔어야 하는데, 들통에 물이 꽤 많다는 생각만 하고 최고의 화력인 P에 놓고 나간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짧은 시간에 라면이나 끓여봐서 그 기능을 자세히는 모른다.)

그나마 집으로 곧장 왔기 망정이지 만약 다른 일을 더 봤다던가, 친한 사람이라도 만나 (들통 올려놓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낮술이라도 했더라면 어쩔 뻔 했는가. 닭발도 막걸리도 먹지 못하고 연기만 잔뜩 먹었던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나에게 하나의 버릇이 생겼다. 집에 있다가 외출할 때면 집안에 사람이 있건 없건 주방을 한번 살펴보고 나가는 버릇이다. 언젠가 이 버릇마저 망각하게 되면 어쩔까 싶어 걱정이다. 하지만 세월의 덧없음과 나이 탓을 하며 맘을 느긋하게 먹어야지 별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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