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건망증
  • 금산중앙신문
  • 승인 2019.03.0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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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수필가, 전 충남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할 수 없는 결혼식 축의금을 친구에게 대납토록 부탁했던 일이 생각나 송금하려고 집 근처의 농협에 들렀을 때다. 계좌이체를 한 후, 휴게의자에 앉아 송금사실을 알리려고 카톡문자를 넣고 있는데, 자동현금출납기 한 대가 ‘뚜뚜뚜뚜뚜뚜...’하며 연속음을 내는 것이었다.

‘고장 났나?’하는 생각을 하며 기계 쪽을 바라보니 마침 어떤 아주머니가 들어와 기계 앞에 서더니 “어? 여기 돈이 있네. 누가 안 가져갔는가 보네”한다. 그러자 안쪽의 데스크에서 여직원이 “그냥 두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옆의 기계로 옮기고 난 후 곧 경고음이 멈추고, 기계가 돈을 덥석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자동현금출납기가 인출한 돈을 가져가지 않으면 한동안 경고음을 내다가 돈을 도로 삼킨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돈을 찾아가지 않은 사람이 곧바로 짐작됐다. 조금 전 계좌이체를 하고 있을 때, 뒤편 옆에서 “어? 내가 무얼 하려 왔지? 정신도 참.” 어쩌고 하며 혼잣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궁금해서 얼핏 돌아보니 마른 체격에 모자를 쓴 노인 분이셨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려니까 아까의 그 노인 분이 황급히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25만원 안 가져갔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농협 여직원이 “조금 있다 4시 넘으면 확인해서 통장에 도로 넣어드리겠다.”고 한다.

나는 건망증 심한 노인 분이 돈을 도로 찾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농협을 나왔다. 하기야 지금 세상에 남의 돈을 슬쩍 가져갈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행여라도 ‘이게 웬 떡이냐’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돈을 덥석 집어갔다가는 절도혐의로 금방 잡힐 것이 뻔하다. 잘못하면 형사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자동현금출납기에는 CCTV가 내장돼 있지 않은가. 설령 CCTV가 설치돼 있지 않다하더라도 깜빡하고 놓고 간 남의 돈을 공짜라고 탐내는 것은 몹쓸 짓이다. 누구의 돈이던 간에 돈에는 각기 다른 사연이 붙어 있기 마련이다.

어떤 돈은 힘들여 벌어 모은 돈일 수도 있고, 눈물겹게 번 돈일 수도 있다. 그 쓰임에 있어서도 어떤 경우는 기쁜 용도로 쓰이는 돈이 있는가 하면, 어떤 돈은 긴급한 용도의 돈일 수도 있고, 때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픈 용도로 쓰이기도 할 것이다. 설사 그 돈이 헤프게 쓰인다 해도 그건 돈 주인이 가질 권리이지 제3자가 넘볼 일은 아니다.

나이 드신 노인분의 건망증 때문에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내가 다른 사람의 건망증을 걱정할 형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건망증도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요즈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예전 같지가 않음을 느낄 때가 많다. 집자동차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예사고, 어떤 때는 급히 서둘다 자동차 앞에 가서야 자동차 키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알고 도로 집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시간이 없다고 서둘다가 되레 시간을 지체시킨 것이다.

또, 길에서 모처럼 만난 친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얼굴은 또렷한데 이름이 날 듯 날듯 하면서도 나지 않는 것이다. 친구하고 헤어져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서야 생각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스스로 안타까워 머리통을 쥐어박기도 한다.

집에서 화장실을 나와 불 끄는 걸 잊는 것은 다반사다. 어느 때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열었다가 문자 온 것만을 읽고 도로 닫는 경우도 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기가 막히다.

심지어는 글을 쓰다가도 저장하는 것을 잊고 컴퓨터를 닫았다가 홀라당 날려버린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어느 정도 분량의 글을 쓰거나, 수정을 한 후에는 저장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건망증은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현상이라니 난들 어찌하겠는가.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건망증이 고마운 경우도 없지는 않다. 건망증이 있기 망정이지 건망증이 없다면 슬픈 일이나, 억울한 일이나, 기분 나쁜 일이나, 안타까운 일 등을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일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산다면 이 또한 큰 불행이지 않겠는가.

건망증을 걱정하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건망증에 좋지 않다니 차라리 건망증 자체를 잊어야겠다. 그게 낫겠다. 이제부터 마음을 편하게 먹고 건망증을 끼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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