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쓰기 강행군
수필쓰기 강행군
  • 나창호 수필가
  • 승인 2019.05.0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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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부군수

이솝은 BC6세기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우화작가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리석은 인간생활을 풍자하는 글을 잘 썼다. 노예 신분이었지만 교훈을 주는 이런 재미난 우화를 많이 써서 마침내 자유인이 됐다고 한다.

누구나 어렸을 때 이솝우화를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초등학교교과서에도 여러 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 팔러가는 당나귀 등은 특히 낯익은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솝우화가 단순 이분법적이며 흑백논리에 치우친다는 지적을 하기도하지만 지금도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만은 어렸을 때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지금도 가끔 오래된 헌책을 꺼내 펼쳐볼 때가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려다가 어려움에 처하면 떠올리는 아주 짧은 내용의 이솝우화가 있다. 바로 ‘여우와 포도’ 이야기다.

‘배가 몹시 고픈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아주 높게 매달린 포도송이를 발견했다. 따 먹으려고 몇 번이나 껑충 뛰어올랐지만 포도송이가 주둥이에 닿지 않았다. 뛰어오를 때마다 나둥그러질 뿐이었다. 마침내 지치고 실망한 여우가 “저 까짓 시어빠진 포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하면서 딴 데로 간다는 내용이다.’ 제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며 합리화한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또 이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연을 말해본다.

작년 11월말쯤 그동안 신문이나 문예지 등에 게재했던 글들을 모아 ‘도루묵과 메구로의 꽁치’라는 전자책을 냈었다. 흩어진 구슬을 꿰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읽어보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아는 지인들에게 무료구독용을 전송해주었다. 잘 읽고 있다는 답신을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메일 자체를 아예 열어보지 않거나, 열어봤는데 반응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내 글이 시원치 않아서 그러려니 하며 편하게 마음을 먹고 지냈다.

그런데 새해 들어 어느 날, 평소 알고지내며 가끔씩 술자리를 같이하는 젊은 박 시인이 전화를 해왔다. “선배님, 전자책 잘 읽었습니다.”하고. 그러면서 내용이 좋은데 종이책을 낼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출판비가 만만찮을 텐데 지금은 어렵고 나중에나 생각해보겠다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자 박 시인은 매년 초에 작품을 심사해서 출판비를 보조해 주는 제도가 있다면서, 아직 신청기간이 마감되지 않은 것 같으니 수필 쪽으로 신청을 해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어디에다가 무슨 서류를 내야하는지를 몰라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데, 이번에는 문예마을에서 같이 활동하는 여류수필가-작년에 자금을 지원받아 책을 냈다-가 자금지원신청을 해보라면서 전화를 해왔다. 그러면서 이든북 대표에게 신청대행을 맡기면 된다면서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든북 대표를 만나게 되었고, 이러저러한 상의를 한 후 필요한 신청서류-주민등록 및 등단 관련 서류, 문예지 발표 실적, 신작수필 3편 등등-를 마련해서 넘기게 되었다. 그렇게 신청을 맡기고는 무심하게 지냈다.

그런데 한 달이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안 됐나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등단한지도 얼마 안 되고, 또 지원을 받으려는 쟁쟁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애초에 신청할 때도 이든북 대표에게 안 돼도 상관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말라고 했었다. 따라서 굳이 더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지내는데 한참 뒤 3월 초가 돼서야 지원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이든북 대표로부터도, 평소에 목소리가 크고 잘 웃는 여류작가로부터도 축하전화가 왔다. 문화재단에서는 지원대상임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40명을 선정하는데 지원자가 100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어쨌든 기뻤다. 안 된 것 보다는 낫고, 책을 낸다는 설렘도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나는 작년에 낸 전자책에서 취사선택하고, 신작수필을 좀 더 보태서 책을 낼 요량이었는데, 종이책 뿐 만아니라 전자책도 이중 게재로 자기표절이 된다는 것이었다. 지원기준이 강화된 모양이다. 이든북 대표는 신작으로 채우기 어렵다면 포기신청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어렵게 따낸 것인데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출판시기를 연말께로 늦춰 잡아달라면서 그때까지 한권 분량의 신작수필을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전자책에 넣지 않은 수필은 채 10편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수필쓰기 고난의 행군은 시작됐고, ‘여우와 포도’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배가 고프다. 내 생각에 높이 매달린 포도송이는 수필집이고, 포도알은 한편 한편의 수필이다. 나는 중도에 포기하는 여우가 아니다. 포도송이를 기어이 따서 배를 채울 것이다.

나는 지금도 시간을 쪼개며 혼신을 다해 수필을 쓰고 있다. 때로는 누에고치 실 풀리듯 생각이 술술 잘 풀릴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글맥이 꼭 막혀서 답답할 때도 있다. 글쓰기는 즐거움이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총 23번째 수필을 쓰고 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 같은 수필집을 손에 넣기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다. 잘 익은 포도알 같은 수필들을 모으고 있다. 더러는 덜 익은 시큼한 포도알도 섞이겠지만 말이다.(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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