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밀식·토입답압
소주밀식·토입답압
  • 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19.05.2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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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오늘(5.8)아침, 조간신문을 보니 지금 북한에는 식량이 모자란다고 한다.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의 추산에 의하면 약 140만 톤이나 부족하다고 한다. ‘고깃국에 이밥 먹고, 비단 옷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게 해준다.’고 한 것이 김일성 때부터였다는데 아직도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쌀이 남아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5년 전에도 우리나라에서 1년에 먹다 남겨서 버리는 음식물쓰레기가 20조 원어치나 된다고 했었다.

이로 보면 누구라도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통제사회주의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더 우월함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배곯아 죽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살을 빼려고 일부러 굶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비만자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는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었고, 식량자급은 국가적인 주요과제의 하나였다. 당시 정부는 식량자급을 위한 각종 정책과 시책들을 쏟아내며 국민들에게 실천을 강요했다.

정부는 먹는 것부터 간섭했다.

흰 쌀밥 대신 잡곡을 섞은 혼식을 하도록 하고, 매주 특정한 날 한 끼는 국수나 수제비 같은 밀가루음식을 먹도록 권장했다. 또 밥 지을 때 쌀 한 줌을 덜어내서 모으는 절미저축까지 권장했다.

심지어는 가정집에서 술을 담는 것조차 금지했다. 어느 날 동네에 술 조사라도 나오면 난리가 났고, 어떤 집은 밀주를 하다가 들켜서 벌금을 물기도 했다. 시골사람들은 밀주를 단속하는 술 조사와, 소나무를 베면 처벌하는 솔 감독을 두려워했다. 식량이 절대 부족하던 시대의 식량 확보와, 헐벗은 민둥산의 속성녹화를 위한 고육지책이었지 않나 싶다.

이 뿐 만아니라 정부는 식량증산을 위한 각종 정책과 시책들도 내놓았다. 지력증진을 위한 퇴비생산과 객토사업 같은 것들이다. 집집마다 퇴비장을 만들고 풀을 베어다 썩혀서 퇴비를 만들게 했으며, 아침 밥 먹기 전에 풀 한 짐 베기 운동까지 벌였다.

또 산성화로 지력이 쇠해진 농토에는 황토를 파다 넣는 객토사업을 벌였다. 말이 권장이지 공무원들을 동원한 반강제 사업이었다. 퇴비생산이나 객토사업이 부진하면 공무원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닦달을 했다.

그 당시 농민들은 공무원들이 참 성가셨을 것이다. 그래도 서로의 안면 때문에 싸우지 않고 웃으면서 일했다. 나도 그때 고향에서 면서기를 하면서 담당부락에 나가 그렇게 일했다. 그래서 당시의 일들을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

정부는 또 벼 다수확 품종을 육종해서 농가에 보급했다. 바로 모든 농가가 통일해서 심자고 이름붙인 통일벼였다. 일반 벼 보다 수확량이 월등히 많아서 식량증산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다만, 밥이 찰지지 않고 푸석푸석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가 않았다. 자연히 농가에서는 통일벼 재배를 기피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행정지도를 명분으로 농가를 찾아다니며 통일벼 재배를 반강제로 유도했다.

심지어는 일반 벼 못자리를 뒤엎고 통일벼로 못자리를 다시하게 하는 일까지 있었다. (나중에는 미질이 좋은 통일벼 계통 다수확 품종이 다수 개발되어 농가도 호응을 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뿐 만아니라 모내기 방법도 개선했다. 그 당시 농촌은 기계화가 되지 않아서 인력에 의존해 모내기를 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못줄 눈에 맞춰 모를 심어야 했다. 소주밀식(小株密植). 소주를 몰래 만들어 먹자는 말이 아니다. 개선된 모내기 방법이다.

기존 못줄 보다 못줄의 눈 간격을 촘촘히 하는 대신 포기당 묘를 적게 잡아(3-4개 정도) 심는 방법이다. 당연히 포기수가 더 많았다. 당시 통일벼는 포기 가지치기가 왕성해서 그렇게 심어야 수확량이 더 많았던 것이다.

식량자급이 얼마나 시급하고 절박했으면 정부가 이러한 세밀한 방법까지 연구를 했겠는가. 식량증산에 본격적으로 발 벗고 나섰던 그 때는 바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외치며 앞만 보고 뛰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였다.

이제 토입답압(土入踏壓)에 대해 말해본다. 정부는 식량자급을 목표로 벼농사 뿐 만 아니라 보리농사에도 심혈을 쏟았다. 가을에 추수를 한 논에 이모작으로 보리를 갈도록 했다.

보리는 늦가을에 파종해서 겨울을 나야 결실을 맺는다. 그런데 겨울을 나는 동안 서릿발이 서면 보리뿌리가 떠서 말라죽게 되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포기 사이에 흙을 넣고 밟아 주는 것을 토입답압이라고 했다. 보리수확량을 늘리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주로 인력에 의지했던 그 당시의 농민들은 참 고생을 많이 했다. 공무원들도 농가일손 돕기에 나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부는 또 경지정리사업을 해마다 벌였고, 이를 토대로 기계화영농도 실현하게 됐던 것이다.

쌀이 남아도는 지금은 논에 보리 이모작은 고사하고, 일부 남부지방을 제외하고는 밭보리농사도 짓지 않는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크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배곯지 않고 잘 살게 된 것은 당시의 지도자가 미래를 보는 혜안과 통찰력, 강력한 추진력을 갖추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공무원 조직이 있었으며, 정부정책을 따라준 근면한 농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쌀 자급의 배부른 시대는 거저 온 게 아니다. 좋은 정부가 있었고, 정부를 따르며 땀을 흘린 좋은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나는 오늘 아침신문을 읽고 나서, 젊었던 때 시골 면사무소에 근무하며 농민들과 어울려 일했던 옛날이 생각이 나서 이글을 썼다.

현명한 국가지도자를 갖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의 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던 옛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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