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과 고마운 나라 미국
나의 어린 시절과 고마운 나라 미국
  • 나창호 前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19.06.0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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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환갑을 불과 몇 해 앞둔 나이일 때, 나는 뉴저지 쪽 강둑에 서서 허드슨 강 너머로 뉴욕시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빌딩 숲 속에서 삼각으로 푸른빛을 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지붕을 보면서, 나는 부자나라 미국을 동경하던 어린 시절의 배고팠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얀 신작로에 자동차는 달리지 않고, 소달구지나 가끔 다니던 어린 시절 말이다. 그 때를 회상하면서 글을 써 본다.

푸른 보리알이 누렇게 물들어 갈 때면 배가 무지하게 고팠다. 식량이 떨어지는 보릿고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네 앞 뒤 산에서는 배고픔을 모르는 뻐꾸기와 장끼가 힘차게 울었고, 때로는 비둘기가 청승맞게 울었다.

“내일은 배급 날이다. 보자기들 꼭 가지고 오거라.”

담임선생님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배급 날이 되면 누런 강냉이가루를 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말린 우유가루를 주기도 했다. 선생님은 늘 미국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때 강냉이가루는 곱게 집에까지 가지고 갔지만, 우유가루는 집에 가면서 연신 입에 털어 넣었다. 우유가루 중에는 간혹 덩어리진 것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부터 입에 넣었다. 입 주변이 하얗도록 뿌드득대며 먹었다.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것이 여간 맛이 좋은 게 아니었다. 집에 가지고 간 강냉이가루는 개떡처럼 쪄 먹기도 하고, 때로는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동생이 받아온 것과 합치면 식구들의 요긴한 한 끼 양식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누런 얼굴에다 하얀 둥근 버짐을 늘 달고 다녔다. 그만큼 못 먹었고, 그 만큼 영양 상태가 나빴었다. 물론 나만이 그런 게 아니라, 또래들 거의가 그랬다. 횟배도 많이 앓았다. 기생충에 쉽게 감염되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동네 공동우물은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오면 턱밑까지 차올랐고 물색이 부연했다. 건수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물을 먹었으니 위생적으로 좋을 리가 없었다.

어쩌다 학교에서 나눠준 산토닌을 밥 한 끼 굶으며 먹고 나서 한참 뒤에 똥을 누면 꺼깽이(회충)가 하얗게 섞여 나왔다. 채 죽지 않아서 징그럽게 꾸물거렸다.

어렸을 때 가을하늘은 무척 파랬다. 하지만 따뜻한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 여기저기서는 똥냄새가 진하게 났다. 무밭과 배추밭에 거름으로 똥독간의 똥을 퍼다 주었기 때문이다. 배추나 무포기 사이에 구덩이를 파거나 골을 타고 인분을 넣었던 것이다. 나중에 똥 먹은 무는 길게 하늘로 솟으며 자랐고, 햇볕 받은 위 부분은 초록색 물이 들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나는 또래들과 어울려 여기 저기 들판을 헤매며 먹을 것을 찾았다. 끝내는 너도 나도 아무 밭에나 들어가 무를 뽑아 씻지도 않고 먹었다. 손톱으로 파란 부분의 껍질만 돌려내고 그냥 먹었으니, 기생충에 감염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 똥독 오른다고 큰 걱정을 해도 배고픈 판에 그런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은 믿기 어려운 말을 곧잘 했다. 미국은 엄청난 부자 나라라고 했다. 강냉이가루와 우유가루도 먹고 남아서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 미국은 우리처럼 손으로 농사를 짓지 않고 기계로 짓는데, 기계가 밀밭을 밀고 나가면 저절로 타작이 되면서, 밀이 밀가루가 되고 나중에는 빵이 되어 나온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국은 그 때 이미 콤바인을 사용해서 밀 수확을 한 것 같은데, 미국에 가보지 않은 선생님이 누군가로부터 말을 전해 듣고 과장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어렸던 나는 그저 입을 벌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 미국 도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102층짜리 집이 있다고도 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라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했다. 대부분 게딱지만한 초가집에 살던 시골뜨기 우리들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고, 긴가민가했다. 102층짜리 집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부자나라,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알고 자랐다. 물론 지금도 미국은 잘 사는 나라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 나는 왜 미국이라고 하는지를 몰랐다. 한자를 배우고 나서야 미국이 아름다울 미(美)자字를 쓰는 나라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라이름이 아름다운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나라라서 그렇게 불렀지 않나 짐작될 뿐이었다.

나는 지금도 미국을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어려서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식량구호를 해주기도 했지만, 그 이전의 6.25 남침 전쟁 때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해준 것도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던 우리나라에 와서 5만4000명이나 죽고, 10만3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8000여 명의 행불자를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자유를 지켜준 나라가 아닌가. 배고픔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자유가 없는 세상 아닌가. 미국의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까지 했다.

나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용사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명복을 비는 한편으로, 이역만리 한국 땅에 와서 자유를 수호하다 숭고한 목숨을 바친 미국의 용사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한낱 무명의 필부에 불과하지만,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주고, 배고픔의 설움을 달래준 미국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쌀이 남아돌도록 잘 살게 된 것도 폐허 속의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 기에 미국의 막대한 원조가 있었기 때문 아닌가. 처절하게 배 골았던 슬픈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고, 앞으로도 피를 함께 나눌 동맹국이어야 한다. 나라 없이 번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1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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