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던 이스탄불의 밤거리
어둡던 이스탄불의 밤거리
  •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19.06.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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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2017<대전문학> 등단

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얼마 전의 일이다. 친구 둘과 다소 늦은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잔씩 하고 있는데, 식당주인이 9시20분에 문을 닫는다고 예고한다. 그 때 시간이 9시 경이었는데, 새로 들어오는 손님도 받지를 않는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사장에게 이유를 물으니, 주 52시간근무제와 최저임금 때문이란다. 혼자 경영하는 식당이 아니라 제법 큰 식당이기 때문에 주방장도 필요하고, 서빙 하는 종업원도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문득 오래전에 겪은 어둡던 이스탄불의 밤거리가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1년 과정의 교육수료를 1개월여 앞두고 해외여행을 할 때였다. 2009년 11월 중순경에 마지막 여행지인 터키의 이스탄불 국제공항에 밤늦어 도착했다. 나는 공항면세점에서 양주를 한 병 샀다. 숙소에서 분임 조 동료들과 피로를 풀 심산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후, 같은 분임의 동료들을 내방으로 모이도록 했다. 하지만 안주거리가 없었다. 호텔 객실의 냉장고를 열어봐도 먹을 게 없었고, 이미 여러 나라(체코, 오스트리아, 그리스)를 거쳐서 왔기 때문에 각자의 짐 가방 속에도 안주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시간이 제법 돼서 호텔에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까 호텔에 들어올 때 보니, 호텔이 번화가와는 거리가 먼, 외지고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텔 주위에 불빛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독한 술을 안주 없이 먹을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육포나 치즈라도 있어야 했다. 나는 “안주 사오겠다.”면서 호텔방을 나섰다. ‘설마 혼자 다녀오라고 할까?’하면서 누군가는 따라 나설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는 못가겠다”며 도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텔 밖의 길거리는 예상보다 훨씬 더 어둡고 한적했다. 희미한 가로등만 듬성듬성 보일 뿐 오가는 사람도 상점도 보이지가 않았다. 불들을 끈 때문이었다. ‘호텔 가까이에 상점이 있겠지’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나는 ‘어딘가 불 켜진 가게가 있겠지’하며 어둑한 길을 꺾어가면서 한참을 더 걸어 나갔지만, 우리나라의 마트나 슈퍼마켓 같은 것은 고사하고, 작은 상점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우리나라와 사정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호텔로부터 꽤 먼 거리를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스탄불은 처음인데다 혼자서 불량배라도 만나면 속수무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스탄불은 우리나라처럼 치안이 좋지 않으니 가급적 혼자 행동을 삼가라는 주의를 들었던 터이기도 했다. 자칫하면 나로 인해서 모두가 여행일정을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빈손이었지만 왔던 길을 되짚으며 호텔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서 “꽤 멀리까지 나가봤는데도 상점이 없다. 더 멀리 큰길까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혼자는 못 가겠다.”며 두어 명 더 따라나서라고 했다. 그들은 “한참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다”며 덩치가 큰 경상도 친구와 경기도 친구가 따라 나섰다.

나는 다시 이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혹시 내가 아까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며 지나가는 거리와, 좌우로 난 골목까지 다시 살폈지만, 역시 불빛이 비치는 집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더 걸어 꽤 멀리 정면을 가로지르는 큰길까지 나갔다. 여러 명이라서 그런지 아까 혼자일 때처럼 두려운 생각이나 찜찜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같으면 늦은 밤이라도 환한 거리에 오가는 차량들이 제법 많고, 여기저기 불을 밝힌 가게들이 숱할 텐데, 여기는 큰길인데도 차가 가끔 한두 대 지나갈 뿐이고, 불을 밝힌 가게도 보이지 않았다. 터키가 이슬람 국가라서 술집이 없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거리가 너무 한적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길 건너편까지 자세히 살폈다. 마침내 저 멀리로 한참 떨어진 곳에 불 켜진 집이 한 군데 보였다. 나는 저 집까지만 가보고 상점이 아니면 그냥 돌아가자고 말했다. 더 이상 가게를 찾는다며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더 돌아다녀본들 소용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이 그 집은 자그마한 가게였고, 젊은 청년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육포나 치즈는 고사하고, 건어물이나 과자류도 없었다. 오직 말린 무화과나 건포도 같은, 건 과일류뿐이었다. 더구나 청년은 영어를 전혀 못했다. 우리도 짧은 영어였지만, 건 과일류를 이것저것 고르고 나서 “얼마냐?(How much?)”하고 물어도 눈만 멀뚱거렸다. 이번에는 우리가 터키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10유로를 달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고생 끝에 호텔로 돌아와서 벌어진 술자리는 유쾌했다. 양주 한 병은 금방 동이 났고, 누군가 짐 가방에서 꺼내온 소주로 술자리를 더 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터키사람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로 알고 무척 친절히 대했다. 이스탄불시청에 들렸을 때 ‘스포츠 마케팅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당시 이스탄불 시는 2020하계올림픽 유치를 추진하고 있었다.-에 대한 의견교환을 할 때도 시청 공무원들은 “우리는 돌궐족이다.”라면서 우리와 형제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미 고구려 때부터 ‘형제나라’라는 뜻이었다.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여행용트렁크에 매달린 ‘Seoul, Korea'라는 종이팻말을 보고는 쫒아 와서 팻말을 만지며 “한국에서 왔느냐?”고 반가워하는 아가씨들까지 있었다.

나는 그 때, 이스탄불의 어두운 밤거리를 헤맬 때, 설혹 내가 불량배를 만났다하더라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Nice to meet you. I'm from Korea.)”라고 말하면 아무런 탈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만큼 터키사람들은 한국인에게 친절했다.

나는 친구들과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걸으면서 ‘자칫 우리나라 밤거리도 곧 일찍 어두워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들이 일찍 문을 닫으면 자연히 밤거리가 일찍 어두워 질 것 아닌가? 어리석게 탈원전을 선언한 정부가 결국 전기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전기를 아끼자’며, 식당의 작은 간판 불마저 끄게 하고, 가로등마저 격등제로 켤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나만의 지나친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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