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금강산
내가 본 금강산
  • 나창호 수필가
  • 승인 2019.06.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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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부군수

금강산은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많다. 봄은 금강산, 여름은 봉래산, 가을은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 부른다.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하구나.’하는 금강산 노래를 부르던 초등학교 때는, 1만2천봉이 마음속으로만 상상되던 미지의 산이고 동경의 산이었다.

성인이 됐을 때도 남·북이 늘 대치하는 상황에서 북한 땅 금강산에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무척 보고 싶어 하던 산이라고 한다. “고려 땅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의 말이라고 한다. 일반의 중국인들도 금강산 절경을 전해 듣거나, 그림을 보고는 “고려 땅에 다시 태어나 금강산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한 엿새 중에 마지막 하루는 오로지 금강산을 만드는데 보냈을 것이다.” 1926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신혼여행 차 일본에 왔다가 금강산에 들렸을 때, 그 절경을 보고 감탄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우리가 어케 알갔시요. 산신령도 아닌데.” 만물상을 보려고 산길을 오르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올 것 같았다. 마침 2인1조로 주요지점 마다 지키는(?) 북한 아가씨들에게 “오늘 날씨가 어떨 것 같으냐. 혹시 비가 오지는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이내 돌아온 대답이었다.

약 19년 전인 2000년의 여름에,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던 봉래산에 첫발을 디뎠다. 지금은 고인이 된지 오래인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해서 금강산 관광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정부는 햇볕정책을 펴면서 국민들이 금강산 관광에 나서도록 은근히 부추겼다. 자연히 국가나 지자체공무원들도 견학이나 행사개최 등을 이유로 금강산 관광길에 나서게 되었다. 일반인들도 금강산을 한창 찾을 때였다.

나는 그때 충청남도공무원교육원에서 교무담당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국가전문행정연수원이 주관하는 지방행정연수대회를 금강산 견학과 연계해 금강호에서 개최함에 따라, 교육원장과 교학과장을 수행하게 되었고, 우연찮게 금강산 관광에 동참하게 됐던 것이다. 2박3일의 일정이었다.

당시는 금강산으로 가는 육로가 열리지 않아서 현대가 운영하는 선박을 이용해 바닷길로 가야만 했다. 동해에서 밤에 배를 타고 공해 상으로 나가 이튿날 아침에 장전항에 입항하는 역ㄷ자형 항해를 해야 했다.

항해하는 동안 시간을 내서 배안에서 연수대회를 열었지만, 이는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방편이고 명분이었을 것이다.

견문이 짧았던 나는 배안에 호텔처럼 수많은 방과 각종 편의시설이 있고, 10여 층을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또 항해시간의 지루함을 달래주려고 그랬겠지만, 연예인을 포함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출연해서 선상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벅찬 마음으로 북한 땅을 딛고 입국수속을 밟는데, ‘반갑습니다.’ 노래가 연신 흘러 나왔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로 시작되는 경쾌한 노래였다. 금강산에 있는 동안 수없이 들었다. 천불산이 보이는 온정리는 남쪽에서 간 관광객들과 이들을 실어 나르는 현대 소속 버스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이렇게 수속을 마친 첫날, 만물상 향해 길을 나섰다. 버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는 동안 쭉쭉 솟은 금강산 미인송들이 눈에 들어왔다. 병풍 속에서나 보던 붉은 줄기 소나무들을 실제로 보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만물상 코스를 가다가 보았던 삼선암이나 귀면암 보다도 금강산 미인송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 뇌리에 박혀 있다.

한동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만물상으로 오르는 산길은 걸어야 했는데, 나는 그 도중에 아가씨들을 만나 일기를 물었고, “산신령도 아닌데 어케 알겠냐.”는 대답을 들었던 것이다. 북한 땅을 처음 밟았던 나는 그들이 무뚝뚝하게 외면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일행 중 누군가가 금강산 관광 기념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니, “같이 찍지는 못한다면서 대신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한다. 아직 상부에서 허락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과 헤어져 만물상이 보인다는 전망지점까지 어렵게 올라갔지만, 만물상은 코빽이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인지 운무인지가 온통 뒤덮고 있을 뿐이었다. 현대 측 가이드가 안개 속을 가리키며 만물상이 펼쳐진 모습을 연신 설명했지만, 눈앞은 온통 흰색뿐이었다. 혹시나 하며 한참을 더 기다려보다가 이내 아쉬움을 안고 도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이런 날은 비싼 입산료를 퇴해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했다.

온정리로 돌아와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데 금강산을 몇 차례나 왔다는 옆 자리의 어떤 사람이 만물상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자기도 몇 번 만에 겨우 봤다고 한다. 여행 중에는 낯선 사람과도 쉽게 말문을 열게 된다. 서로가 여행하는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점심 후에는 온정리에서 자유시간을 가졌다. 먼저 대형 공중목욕탕에서 단체목욕을 하며 피로를 풀었다. 가이드 말이 얼마 전에 남탕과 여탕을 서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야 탕 냄새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옥외 탕으로 나가니 가랑비를 뿌리는데 어깨 위쪽의 시원함과 아래쪽의 뜨거움을 함께 느끼는 묘미가 있었다.

목욕 후에는 대동강맥주를 한 잔씩하며 대화들을 하고 각자 쇼핑도 했다. 북한 상품 중에 아직도 기억되는 것은 들쭉술과 징그러운 구렁이 술, 말린 산삼 같은 것이다.

저녁을 먹고는 곡예단의 묘기를 관람했다. 높은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놀랍기는 했지만, 저런 기술을 읽히려고 얼마나 시달렸을까를 생각하니 그리 유쾌한 것만도 아니었다. 막을 내릴 때는 ‘조선은 하나다’라는 세로현수막을 펼쳤다. 은연중에 펼치는 선전이라 느껴졌다. 공연을 보고나서 잠은 금강호로 돌아와서 잤다.

이튿날 일찍 신계사 터로 가는 길이었다. 길옆으로 옥수수 밭이 많이 보이는데 옥수수는 이미 수확했는지 보이지 않고, 옥수수 대의 키 작음으로 보아 작황이 그리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을 더 가니 야산 밑의 배 밭에서 농부인지 농장원인지 서너 명이 배 잎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나라 배처럼 두 주먹을 합친 것 마냥 크지가 않고, 탱자크기 보다 약간 더 큰 것 같았다. 아직 수확 철이 제법 남아 있다 해도 ‘저 작은 것을 먹으려고 감싸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키가 작았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무표정했다. 신계사 터는 말 그대로 공터였다. ‘나는 이걸 보려고 왔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구룡폭포와 상팔담으로 가는 길 입구 관광안내도 앞. 북측 안내원이 관광안내를 하다 웬 언어주체성을 논했다. “공화국은 언어주체성을 유지하며 우리말을 잘 지키고 있는데, 남조선은 영어를 써서 언어주체성을 상실했다.”고 신랄히 비판했던 것이다.

우스웠던 것은 그의 말을 일껏 듣고 나서, 어느 시·도인지 모를 나이 지긋한 공무원이 “좋은 말 해줬다. 내가 돌아가서 칼럼을 쓰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칼럼은 영어가 아니던가? 그만큼 우리가 무의식중에 영어를 많이 쓰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신계동 초입부터 물은 맑고 깨끗했다. 아쉬운 것은 계곡 옆길 너럭바위마다 관찰사 누구, 현감 누구 하는 이름들을 깊게 파 놓은 것이었다. 한 두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수두룩했다. 그들은 그렇게 이름을 남겼는지 모르지만 그 이름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했다. “관찰사 000이 어떤 놈이야?”

맑은 물 따라 계곡을 조금 더 들어가니 다리 건너편으로 둥근 형태의 아름답고 아담한 단층건물이 나왔다. 목란관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음식점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자연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이런 점은 통제사회의 장점이 아닌가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신계동 골짜기는 이미 수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계곡은 추하게 오염됐을 것이다.

헌데 북한 정권의 폐단도 만만찮았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금강산의 널찍한 바위 마다 붉은색 글씨로 새겨 놓은 수많은 선전구호였다. 보기가 흉했다. 또 언젠가 김일성이 왔다가 교시를 했다는 곳마다 표지판이 서있고, 성역화가 돼 있었다. 그런 곳은 2인1조로 지키고 있었다. 한편으로 우습고, 또 한편으로는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심지어 길로 통하는 금강문 바위에까지 ‘백두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어쩌고 하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금강문을 지나면 옥류동이다. 비교적 넓은 소와 바위가 깊게 파인 웅덩이 마다 고인 물빛은 말 그대로 푸른 옥색이고 흐르는 물은 맑았다. 계곡물 따라 산길 따라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금강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금강산은 여자 같은 산이었다.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했다. 토끼 같은 바위도 있고, 새 모양도 있고, 온갖 동물이 다 있는 듯했다. 기기묘묘했다. 곳곳에 폭포가 나오고, 비가 오면 생긴다는 계절폭포도 여기저기서 풍치를 더했다. 산천이 수려했다. 옥빛 물은 맑고 공기는 상쾌했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4대 명산에 대한 평을 평했다고 한다.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않고(壯而不秀), 구월산은 장엄하지도 빼어나지도 않고(不壯不秀),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않고(秀而不壯), 묘향산은 장엄하면서도 수려하다(壯而易秀).”고 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은 확실히 빼어나고 아름다웠지만 웅장한 맛은 없었다. 이는 서산대사의 높은 눈이 아니더라도 금강산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팔담을 보기 위해 오르는 마지막 구간은 가팔랐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오르니 아! 저 밑, 눈 아래로 크고 작은 여덟 개의 웅덩이가 보이고 녹색물빛이 선연했다. 금방이라도 선녀들이 내려올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물 한 모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물을 끌어 올리는 두레박은 고장이 나서 쓸 수가 없었다. 상팔담 물이 내려 쏟아지는 곳이 구룡폭포였다. 아래 쪽 구룡폭포를 보려면 상팔담을 내려와 폭포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지난번의 폭우로 길이 끊겼다고 한다.

어제 만물상을 보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장엄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구룡폭포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컸다. 나의 금강산 관광은 이렇게 아쉽게 끝났다. 돌아오는 금강호는 장전항을 낮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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