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피서
늦은 피서
  • 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19.08.31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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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늦은 피서를 간다며 집밖을 나서니 선들 바람이 불고 기온이 서늘하다. 처서가 바로 어제였는데, 무더위도 처서가 지나면 꺾인다느니,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계절의 변화가 참 오묘하다.

10시 조금 넘어 용문동 친구네를 태우고 도심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리산 뱀사골을 가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집사람들끼리 다시 상의를 했는지 운일암 반일암으로 간다고 한다. 뱀사골은 계곡이 넓고 시원하지만 취사를 할 수 없어서 삼겹살이라도 구워먹을 수 있는 운일암 반일암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피서는 친구가 진작부터, “어디 계곡에라도 들어가 발이라도 한번 담가야하지 않느냐?”고 재촉하는 것을, 내 사정으로 미뤄온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속으로는 지리산 보다 가까운 곳으로 가서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대를 직접 잡으면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는데, 오늘처럼 집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조수석에 앉아 가면, 차창 밖 경치를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좋다.

차가 마달령 터널을 지나자 푸른 들이 마냥 싱그럽다. 논에는 벌써부터 고개를 숙인 벼들이 보인다. 벼가 병충해 없이 말끔해 올해도 대풍이 들 것 같다. 잎이 햇살에 얼비쳐 하얗게 보이는 것은 벼가 아닌 피다. 어릴 적에 논에서 피 찔 때면 잎 끝이 빨갛고 하얗게 비치는 것이 피라고 어른들이 알려줬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차가 금산읍 변두리 방아고개 윗길을 지나고, 비실고개 넘어 남이면 개삼터를 지나, 보석사 갈림길을 지나친다. 산골 냄새가 물씬 풍긴다.

차가 더 달려 나온 사거리에서, 친구가 직진 방향 내비게이션 안내와 달리, 오른 쪽 길로 꺾으란다. 나는 어렴풋한 기억에 “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지만, 틀림없다며 그리로 가란다. 하지만 한적한 시골길로만 접어들고, 내비게이션이 자꾸 경로를 이탈했다고 한다. 결국 신천리 마을의 큰 둥구나무 밑에서 차를 되돌려 나와야 했다. 하지만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터라 짜증낼 사람도, 짜증내는 사람도 없다. 한가한 시골동네를 보고, 붉은 고추밭을 보고, 밭둑가에 고개 숙인 수수목을 보는 것도 계절을 읽는 재미였다.

차가 구석리 동네 앞길을 지날 때, 금산의 절경 12폭포 안내판이 보였다. 누군가 들렸다가 가자고 하는 것을, 돌아올 때 시간이 있으면 보자며 그냥 지나쳤다. 흑암리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자 곧 충청남도 도계와 금산군 군계, 남이면의 면계를 동시에 벗어난다. 이제부터 전라북도 진안군이다. 길가 곳곳에 ‘버섯이나 임산물을 채취하면 안 된다’는 현수막들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이 곳은 버섯 산지이고, 지금이 버섯철인 모양이다.

드디어 차가 진안군 주천면의 운일암 반일암 길로 들어선다. 옛날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길이 없어 사람이 오가지를 못했다 한다. 하늘과 바위와 나무숲만이 있을 뿐, 오가는 것은 오직 구름 밖에 없다 해서 운일암, 계곡이 깊어 햇빛을 반나절 밖에 볼 수 없다고 해서 반일암이라 불린다고 한다. 벌써 피서 철이 많이 지났나 보다. 줄지어 들어가는 차들도, 계곡을 빠져나오는 차들도 없고, 관리사무소가 있는 아래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계곡을 좀 더 깊이 들어서자 주차장과 도로변에 차들이 제법 많이 주차해 있고, 소나무 그늘에는 텐트들이, 개울에는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우리는 칠은교(七隱橋)를 넘어가 2차선 도로변에 주차를 했다. 칠은동 계곡의 초입인데도 근처 본천과 달리 사람들이 없고 한적하다. 지천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개울가 넓은 곳을 골라 자리를 펴니, 뒤 따라온 아이들 딸린 다른 한 팀도 조금 떨어져서 자리를 잡는다. 벌써 12시가 지나있었다. 대전에서 가깝다고 해도 2시간 남짓 달려온 것이다. 친구네가 삼겹살을 푸짐하게 끊어왔다. 물가에서 삼겹살 구이와 먹는 소주가 꿀맛 같다.

계곡물이 무척 맑다. 다슬기와 버들치송사리도 보인다. 지난 날 누군가 넓적한 돌을 놓고 탁족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우리도 그들이 남겨놓은 돌 자리에 앉아서 탁족을 즐겼다. 물이 지나치게 차지 않아서 좋다. 다리가 시원하고 피로도 풀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오후 4시 조금 넘어서 자리를 털었다. 여자들이 돌아가다 12폭포를 봐야지, 언제 또 오겠냐고 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운일암 반일암 계곡물이 맑다. 하천 바닥 대부분이 암반이고 곳곳에 큰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물이 맑고 깊다. 수량이 많아 가뭄에도 물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늘에는 구름, 땅에는 옥수, 계곡에는 바람이 흐르는 곳이다. 나는 문득 물소리 낭랑한 계곡 가에 자리 펴고 앉아 좋은 사람들과 달을 벗 삼아 술을 따르면 운치가 그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쯤 달려 12폭포 가는 길로 돌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니, 바람 쐬려 개울가에 나온듯한 젊은 사람 몇몇이 있어 12폭포까지 소요시간을 물으니 5폭포까지 20분쯤 걸린단다.

한동안 농로를 따라가다 폭포 길로 들어서니 주변이 말끔하다. 소나무를 제외한 활엽잡목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물길이 하도 맑아서 피서지로서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폭포를 찾아온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1폭포와 2폭포는 실망스러웠다. 작은 사람 키보다 못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길을 폭포라 이름하고 있었다. 안내 표지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옛날 누군가가 12폭포를 정할 때 억지로 끼워 넣었지 않나 싶다. 10폭포라고 하면 부르기가 민망하고, 듣는 사람도 거북할 것 아닌가? 그런데 3폭포와 4폭포도 폭포라고 하기가 민망하다. 이로 보면 내 짐작이 틀린 것 같다.

하지만 제5폭포는 폭포다웠다. 사람 몇 길 높이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 바로 밑에 불쑥한 돌이 있고, 그 돌 밑으로 작은 물웅덩이가 있다. 아니 폭포 물 떨어지는 돌 위 부분이 푹 파여서 아래쪽이 솟은 돌처럼 보이는 것 같다. 폭포 아래로는 온통 암반바닥이고 물이 맑았다. 맑은 물속에서는 또 하나의 폭포물줄기가 거꾸로 솟구친다.

폭포 왼편으로 오르막 등산길이 나있다. 5폭포 위로 7개의 폭포가 더 있다는데 언제 다시 와서 12폭포를 모두 돌아봐야겠다. 한동안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보며 더위를 식히다가 내려왔다.

12폭포길,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이 그리 좋을 수 없다. 맑은 물, 푸른 숲, 깨끗한 계곡, 이름 모를 꽃들, 아름다운 나비 떼, 산새들 울음소리, 모두가 싱그럽고 아름답다. 해가 설핏해서 귀로에 올랐다. 어쨌든 올해도 늦게나마 피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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