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와 조조
관우와 조조
  • 나창호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19.09.0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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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를 여러 번 읽었다. 초등학교 때는 작가가 누군지 모르는 단행본 삼국지를 읽었고, 커서는 여러 권짜리 월탄 박종화와 정비석의 삼국지를 읽었다. 삼국지에는 숱한 인물들이 나오고 인물에 대한 느낌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관우와 조조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렸을 때 삼국지를 읽으며 아쉬움을 느낀 것은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살려 보내는 장면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참패를 하고 달아나던 간웅을 꼼짝없이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조조에게 잠시 의탁했던 옛정 때문에 군령을 어기면서까지 살려줄 때는 많이 안타까웠다. 어린 마음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또 하나는 관우가 너무 일찍 허무하게 죽는 것이었다. 조조와 손권의 협공에 쫒긴 관우가 아주 작은 맥성에 들어가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자 탈출을 하는 중에 여몽의 포로가 되고, 손권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다 참수당할 때는 아쉬움이 무척 컸다. 구원군을 보내지 않은 유봉과 맹달의 서툰 판단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낀 점은 유비는 인자하지만 우유부단한 게 아쉽고, 관우는 용맹하고 과묵하지만 강한 자존심 때문에 사람을 경시하는 게 흠이고, 장비는 용맹무쌍하지만 무식한데다 성격이 불같이 급한 것이 단점 같았다. 지혜롭고 현명한 제갈량은 군사전략은 물론 다방면에서 뛰어났지만 건강이 약해 오래 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조조는 간웅으로 불리며 온갖 험한 짓-자기의 은인인 여백사 가족의 몰살 등-과, 간사하고 냉혹한 짓을 하는 게 흠결이고 밉상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위민 할 줄 알았고, 결단력이 좋았다. 사마의는 느긋한 인내심과 능구렁이처럼 속내를 들어 내지 않고 몸을 보전해 마침내 최종 승자가 되었다. 조조의 위가 유비의 촉을 멸했지만, 사마의의 차자 사마소가 진왕이 되고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위를 멸했다.

오의 손권은 젊지만 침착하고 경청을 잘해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썼다. 육손은 나이가 젊은데도 지휘관으로서 손색이 없었고, 관우의 복수심에 불타는 유비를 침착하게 대적하며 협곡으로 유인한 후, 화공을 감행해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다. 관우를 죽인 손권은 후환이 두려워 관우의 목을 목갑에 담아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관우가 죽었으니 이제부터 잠을 편히 잘 것이라며 좋아하지만, 지략가인 사마의가 이는 책임을 돌리려는 손권의 술책이라면서 관우의 장사를 왕후(王侯)의 예로 후하게 지내주어야 유비·장비 도원결의형제의 화를 면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조조는 향나무로 몸통을 깎고 관우의 목을 맞춰 낙양성 남문 밖에다 후하게 장사를 지냈다.

나는 8년 전쯤 낙양시(洛陽市)의 목단축제에 참석했다가 관림(關林)이라 불리는 이 무덤을 본 일이 있다. 용문석굴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들렀는데 주변이 무척 넓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관우의 머리무덤은 마치 큰 동산 같았고, 무덤 위로 나무들이 숱했다. 사천성의 성도 무후사에 있는 유비의 묘에도 나무들이 많았는데 중국에서는 나무들이 무성해야 좋은 무덤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웅호걸로 천하를 호령하던 이들도 이제는 한 줌의 흙이 되었을 뿐이니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관릉(關陵)이라 불리는 관우의 몸통무덤은 당시 오나라였던 호북성 당양(湖北省 當陽)에 있다는데 아직 가보지를 못했고, 의형제 중 막내인 장비의 무덤은 하북성(河北省)의 탁주시(涿州市)에 있다는데 거기도 아직 가보지를 못했다. 하지만 언제 한 번은 꼭 가보고 싶다. 태어난 날과 시간은 달라도 한날한시에 죽자고 결의한 그들의 무덤이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멀리 흩어져 있어 아쉬운 생각도 들지만 각각의 무덤을 모두 보고 싶기 때문이다.

관림에 동행한 낙양시공무원들에게 관우의 무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니 중국인들은 무덤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일행만 찍었던 기억이 난다.

관우가 살아서 위나라 군과 싸울 때 오른쪽 팔뚝에 독화살을 맞았다. 소식을 듣고 당대의 명의 화타(華陀)가 오나라에서 찾아 왔다. 급히 화살을 뽑아냈지만 살촉에 바른 독이 뼈골까지 퍼지고 팔이 퉁퉁 부었을 때였다. 화타는 상처를 살피고 나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영영 쓰지 못한다며 “뾰족한 칼로 살을 째고 독이 스며든 뼛속을 긁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통증이 심하다며 팔뚝을 기둥에 묶어야 한다고 하는데도 관우는 부하와 바둑을 두던 채로 팔뚝을 내밀며 “그냥 수술을 하라”고 했다. 피를 동이로 쏟고 뼈를 박박 긁는 데도 관우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태연히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강하고 과묵한 관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조는 말년에 심한 두통을 알았다. 손권이 보낸 관우의 목을 들여다보다 관우의 수급이 눈을 뜨며 긴 수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렇다고도 했다. 조조는 동향사람인 명의 화타를 불렀다. 관우를 치료한 바로 그 명의였다. 진찰을 마친 화타는 병의 뿌리가 뇌수까지 박혀있어서 탕약으로는 고칠 수 없고, 마폐탕(麻肺湯:마취약)을 달여 마신 후 예리한 도끼로 두개골을 열어 뇌대(腦袋) 속에 가득 찬, 바람과 풍증세를 걷어내야 낫는다고 했다. 하지만 조조는 머리를 쪼갠다는 말에 크게 노했다.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의심을 품고 화타를 옥에 가둬 버렸다. 조조의 의심을 풀지 못한 화타는 불행이도 옥에서 죽었다. 화타가 죽자 조조도 악몽을 동반한 두통증세가 점점 심해지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조조는 명의를 곁에 두고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여기서 약 1800년 전의 중국에서는 이미 마취약과 함께 외과수술이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한가지쯤 교훈도 얻을 수 있다. 관우는 스스로 찾아온 화타를 믿고 대범하게 치료를 내맡겼다. 화타는 최선을 다해 치료를 했고, 관우는 고질병을 고칠 수 있었다. 조조는 자신이 화타를 불러놓고도 소심해서 믿지를 못하고 되레 의심을 했다. 조조의 의심은 천하의 명의를 죽였고, 끝내는 그 자신도 죽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관우는 (무당 집에까지) 믿음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지만, 조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조조는 죽을 때에도 자신의 묘가 도굴되는 것이 두려워 72개나 되는 의총(疑塚)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 중국의 하남성에서 조조의 묘가 발굴됐다는데, 당시에도 진짜니 가짜니 하는 논란이 일었다니, 여전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며 믿음을 얻어야지, 의심을 살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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