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온돌
[칼럼] 온돌
  • 임 솔
  • 승인 2017.12.1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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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박춘우


고향에 내려와 집을 지으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 중 하나는 온돌 구조의 황토방을 만드는 일이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뜨끈뜨끈한 황토방 아랫목에서 허리를 지지는 것도 좋지만 아궁이에 장작불을 활활 피우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객지에서 추운 겨울이 오면 초가지붕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고 굴뚝에는 저녁 짓는 연기가 퐁퐁 솟아오르는 시골 고향 집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허리가 아픈 할머니는 절절 끓는 아랫목에 허리를 지지며 “아이고, 참 시원하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얼음물에 저녁 설거지를 하고 오신 어머니도 빨갛게 언 손을 이불 속에 넣고 “아 손끝이 아려오는구나.” 하고 말씀하시며 이제 살았다고 안도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또 방 한편에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술 단지에서는 술 익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고. 가끔 할머니는 밥 짓고 난 후 사위어가는 부엌 아궁이 삭정이 불에 토종밤을 구워 주시곤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하숙집 아줌마는 절약의 화신이었다. 밤새 선잠을 자면서 연탄 화덕 하나로 하숙방 5개를 돌렸을 정도이니. 그래도 새벽에 잠깐 방바닥이 뜨뜻해지면 온몸이 나른해지고 나도 모르게 늦잠에 빠져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자취할 때에는 더 춥고 배가 고팠다. 연탄불에 아침을 해먹고 학교에 가서 자율학습까지 하고 저녁 늦게 집에 오면, 연탄불이 악마의 콧구멍처럼 까맣게 꺼져있었다. 묵직한 솜이불을 펴놓고 살았지만, 외풍이 심한 허름한 자취방의 추위를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번개탄이 있어 연탄불 피우기가 쉬워졌지만 그때는 몹시 힘들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어느 주말, 어릴 적 소죽을 끓일 때 솔잎과 솔방울이 화력이 세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이내 봉황산에 올라 소나무에 수북이 쌓인 눈을 털어내며 솔방울을 한 자루 따다 잘 말려서 연탄불 쏘시개로 사용했다. 그 후부터 따끈따끈한 방에서 공부할 수가 있었다.

추운 겨울 난방을 위해 온돌을 발명한 우리 조상은 서양의 벽난로처럼 난방을 위해서만 아까운 연료를 태우지 않았다. 아궁이에 지펴진 불은 삼시 세끼 밥을 짓거나 물을 끓이고 난 다음 온돌을 데워 사람들이 겨울의 지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아궁이에 남아있던 잔불은 화로에 담겨져 사랑방을 훈훈하게 달궈주었다. 이것도 부족해 화롯불에 고구마나 군밤을 구워 먹으며 할아버지와 손자들 간의 훈훈한 소통을 이루게 하는 것도 온돌구조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 중의 하나이리라.

또 건강에도 온돌은 이상적이라 한다. 옛 어른들은 “머리는 차게, 발은 따듯하게 해주어야 좋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서양처럼 히터로 난방을 하면 뜨거운 공기가 방 전체로 퍼지지만 온돌구조는 밑바닥부터 온도가 가열돼 서서히 열기가 위로 퍼져 나간다. 따라서 머리의 뜨거운 기운을 식혀서 내려주고 발의 찬 기운을 데워서 올려주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의 역할을 도와주어 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준 것이다.

지금은 온돌구조의 아파트가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등 추운 나라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한류의 하나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선진국에서 조차 한국식 온돌을 자연 친화적이고 과학적인 난방장치로 인정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이 추운 겨울 훌륭한 난방장치로 온돌을 발명한 우리 조상님께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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