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금산의 항일 역사와 소녀상
[칼럼]금산의 항일 역사와 소녀상
  • 박천수 배재대경영학과겸임교수
  • 승인 2020.02.2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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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수 배재대경영학과겸임교수

금산은 수려한 자연을 지닌 청정의 땅이다. 주산인 진악산 아래로는 평화로운 평야가 펼쳐지고 뒤로는 겹겹이 노령,소백산맥의 산들이 병풍처럼 경이로운 장관을 이룬다. 지명조차도 ‘금수강산’의 ‘금산’이다. 더욱이 인류의 영약인 인삼의 종주지이기 까지 하니 얼마나 은혜로운 땅인가.

자연환경 뿐만 아니다. 이 땅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순국한 성인들도 참 많은 곳이다. 그리고 금산지역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역사적 사건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기간 조헌과 고경명, 영규대사를 중심으로 이치대첩과 같은 5대 전투를 겪어내고, 수많은 의병들의 숭고한 산화를 통해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막아낸 임진왜란 승리의 단초를 제공한 곳이다. 1791년(정조15)에는 이 땅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종교적 신념을 다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의 시발점이 된 곳이며, 1894년(고종31) 봉기된 동학농민운동 보다도 앞서 서장옥을 중심으로 수천의 농민들이 탐관오리를 반격한 동학농민군 최초의 기포지이자 최후까지 저항한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인 금산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한 홍범식은 항일의병을 보호하고 선정을 베풀어 가는 곳마다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한 청백리로 한일합방 때 우리나라에는 360여 명의 군수가 있었으나 순절로 정충대절의 절개를 지킨 군수는 금산군수 한 사람뿐이었다. 또한 그의 제자로 금산지방법원 서기였던 김지섭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의열단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고관들을 저격하고자 도쿄에 잠입하고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천황을 위협한 사건은 일본의 폭정을 세계에 알린 의로운 사건으로 그는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타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사로 들어서며 이제는 가까워져야 할 이웃나라 일본이다. 그러나 여전히 얼음과 숯의 사이처럼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빙탄지간’이다.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우리땅 ‘독도’를 서슴없이 찬탈하려 하고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피해자에게 배상은 커녕, 공식적 사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관계로 최근에는 이를 빌미로 우리나라에 핵심소재 수출제한이라는 경제적 침략 까지 강행하고 있다. 반성할 줄 모르는 참 밉기만 한 일본이다.

며칠 사이 우리지역의 몇몇 단체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평화의 소녀상'을 금산에 설치해야 한다는 건립추진 소식이 들려온다. 극일을 위한 운동에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 민족의 슬픔이 절절히 스며있는 소녀상이며 우리의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미래 도약을 결의하는 훌륭한 상징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장구한 금산의 항일역사에서 인물을 선정하여 상징물을 건립한다면 더욱 역사적 의미가 깊을 것이다.

좋은 제품이란 포지셔닝 고객에 맞는 품질수준과 경쟁우위의 차별적 특징과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말한다. 국민적 관심사인 ‘소녀상’ 건립도 매우 뜻깊은 사업이지만, 우리 지역의 항일과 극일의 표상적 인물을 선정하고 상징물과 대중문화로 확산시킨다면 금산의 역사문화 콘텐츠들과 함께 조화로운 인프라를 차별적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차별적이며 경쟁우위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지혜를 모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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