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유사(風聞遺事)-17
풍문유사(風聞遺事)-17
  • 임 솔
  • 승인 2018.02.06 14:2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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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안 남일우체국장


6.25때 대전전투에서의 딘 소장 관련 이야기다. 사료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있다.

「대전 전투는 미24사단이 북한군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보병 2개 사단에 맞서 금강 방어선 및 대전지역에서 1950년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치른 지연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24사단은 대평리와 공주지역에 각각 연대 병력을 배치해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나흘 동안 저지하다가 대전 외곽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미24사단은 논산과 금산으로 우회 침투한 적 4사단 18연대의 배후공격을 받고 사흘 동안 고전을 치른 끝에 7월 20일 영동으로 철수했다. 이때 대전사수를 위해 대전차포로 적 전차를 파괴하며 분투하던 미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뒤늦게 영동으로 가기 위해 철수 도중 길을 잘못 들은 데다 적의 매복공격을 받고 산속으로 피신했다.

 고립된 산 속에서 딘 소장은 야간이동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일행과 헤어져 홀로 1개월간 산 속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전북 진안까지 남하했으나 도움을 청한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에 넘겨졌다. 그날은 딘 장군의 결혼기념일(8월 25일)이었다. 그는 7월 20일 대전을 떠난 지 36일 만에 진안군 상전면(현 진안읍) 운산리 마을 앞에서 밀고자에 의해 포로가 됐다.

그 뒤 딘 장군을 밀고한 주민은 54년 9월 23일 불법체포죄로 서울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하지만 53년 9월 4일 포로교환으로 돌아온 딘 장군이 그의 선처를 호소해 57년 5월 21일 감형돼 출소했다. 딘 장군은 밀고자 때문에 군인으로서 쌓은 명성과 전공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3년간 포로로 온갖 고초와 치욕을 겪었으나 그를 기꺼이 용서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딘 소장이 1개월을 산속을 헤매다 전북 진안 상전에서 북한군에 잡혔다고 돼있는데 산속에서 1개월을 헤맸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를 못하고 있는 딘 소장의 산속1개월의 생활이 음대리였다는 사실이다. 딘 소장이 숨어서 생활을 하던 곳간이 십 오륙 년 전까지는 있었으나 지금은 그 곳간을 헐어버려서 없어졌다. 그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있어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딘 소장은 후퇴를 하면서 본대와 흩어져 금산방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머들령을 넘어 남하를 하다 허기지고 지친 몸으로 음대리에 도착했다. 딘 소장 일행은 그때 음대리에 사는 강복헌이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 도움을 요청을 하자 강복헌 씨는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곳간에 데리고 가서 대충 먹을 것을 챙겨주었지만 풍족하지 않아 딘 소장 일행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털이 무성하게 자랐고 처음 보는 미국사람인지라 강복헌 씨 아버지는 그들이 무서워 아들한테 빨리 집밖으로 내보내라고 했지만 보름이상을 곳간에서 숨겨주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성화를 못 이겨 딘 소장 일행을 남쪽으로 가게 했는데 이곳에서 출발한지 얼마 가지 못하고 정천에서 붙잡혀 북한군에 포로로 넘겨졌다. 딘 소장이 음대리에서 머물렀던 사실과 그 장소를 보훈처에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보훈처에서 답사를 나오기로 해 기다렸는데 그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는 도중 딘 소장이 숨어 지내던 곳간은 허물어져 버렸고 흉물로 남게 되자 집 주인은 그 곳간을 아예 철거해버리고 말았다.

내 생각으로는 딘 소장이 머물렀던 곳간을 미국에 딘 소장 후손들에게 이야기했으면 딘 소장이 숨어 지내던 곳이라 해서 중요한 유적지로 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만 그 곳간을 생각 없이 없애버리고 만 것이다.

어쩌면 역사적인 피신처였던 곳이기에 더욱 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적인 곳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관리를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본다. 적어도 6.25 때 낙오됐던 딘 소장이 보름 이상을 은신해 숨어 지내던 곳간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6.25 때 주먹밥체험을 하듯이 하나의 테마를 정해 대전에서 정천까지 체험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피신했던 곳간에서 주먹밥과 삶은 감자 음식도 먹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은 체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금도 남일면 음대리 산천재 가는 길목에 있던 딘 소장이 머물렀던 곳간이 있던 곳을 바라보면 그때 강복헌 씨가 생면부지의 미국인들을 보호해주던 순수함과 배가 고파 허겁지겁 감자를 먹던 딘 소장 일행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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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23-09-21 23:37:55
즉 테이버 소위와 헤어진 이후 1953년에 포로 교환으로 돌아오때까지 딘 소장이 다른 미군을 한번도 보지 못 했다고 했기 때문에 딘 소장 일행이 강복헌 씨 집에서 15일간 머물렀다는 것은 목격자의 오해이며, 아마 금강 방어선과 대전 전투 이후 실종 및 낙오한 미군 장병이 1,000여명이 넘는다고 하니 딘 소장 일행 아니고 다른 낙오한 미군 일행이였을 것입니다.

Dean's story로 검색하면 책 안 사고도 딘 소장 회고록 읽을 수 있으니 딘 소장이 홀로 낙오 후 도피 생활하던 부분 꼭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나가다 2023-09-21 23:28:53
강복헌 씨 집에 머물렀던 미군들은 딘 소장 일행이 아닙니다.

딘 소장 회고록에 의하면 19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철수하면서 홀로 낙오한 후
8월 25일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기까지 36일 동안 역시 홀로 낙오했던
미 제24보병사단의 19연대 테이버 소위를 만나서 같이 도피생활을 며칠한 것 이외에는
줄곧 홀로 도피생활을 했으며 다른 미군들과 무리를 지어서 15일 이상
한국인 집에 머물렀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테이버 소위와 헤어지고 난 후의 상황을 아래처럼 딘 소장은 기술했는데
"Tabor was not behind me and I was not to see another American for three long year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