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설날
  • 임 솔
  • 승인 2018.02.13 1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필가 박춘우



음력 1월 1일 정월 초하루 날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설날이다. 매년 설날 일주일 전쯤이면 우리 동네에 다릿골에 사는 떠돌이 이발사가 와서 어른부터 순서대로 머리를 깎았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다음날 오후쯤에야 겨우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오래된 이발 기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머리가 씹히기 일쑤였고 가죽 혁대에 쓱쓱 문질러 날을 세운 면도칼에 비어 피가 나는 게 다반사였다. 아프다고 눈물이라도 흘리면 이발사 아저씨는 상투처럼 머리 일부를 남겨놓고 깎아 주지 않았다. 이에 놀란 우리는 다시는 울지 않을 테니 제발 마저 깎아 달라고 애걸복걸하면서 이발사 아저씨를 쫓아다니는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설을 앞둔 대목장 날, 날씨가 몹시 추운데도 오후만 되면 우리는 참다못해 동구 밖 두꺼비 바위에 올랐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석양 무렵까지 시린 발을 동동 굴러가며 부모님 오시기를 눈이 빠지라 기다렸다. 설빔으로 무엇을 사오실까?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이윽고 저 멀리 약주를 드시고 비틀걸음으로 오시는 아버지와 머리에 큰 보따리를 인 어머니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라치면, '어매~'하고 산이 떠나갈 듯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아래로 내달았다. 언덕에서 큰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듯이.

설날 이틀 전에는 우리 집 사랑방 앞마당에서 돼지를 잡았다.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여 돼지 털을 벗겨 낸 다음 서당골 위샘에 가서 돼지를 부위별로 자르고 깨끗하게 씻어서 집집이 원하는 근수대로 공평하게 분배를 했다. 우리는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만든 공을 차고 놀았다. 점심때 동네 사람들은 팥잎을 넣고 끓인 순댓국을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었다. 우리 식구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편육을 유달리 좋아하신 아버지는 언제나 돼지머리를 지푸라기로 묶어 들고 오셨다. 누나는 캄캄한 밤에 정지로 물을 뜨러 나갔다가 기둥에 걸려있는 돼지 머리를 보고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곤 했었다.

설날 하루 전날, 마당에 솥뚜껑을 거꾸로 걸어놓고 장작불을 지피며 어머니와 누나는 부침개를 부쳤다. 할머니는 방에서 한석봉 어머니마냥 능숙한 솜씨로 떡을 썰었다. 우리는 기름기 도는 맛 난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으며 동네가 떠나가게 노래를 불렀다.
 

  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내일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설날 아침에는 차례(茶禮)를 지내기 위해 식구들 모두 한복을 입었다. 차례 상을 차리면서 아버지는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좌포우혜(左脯右醢),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 등 어려운 문자를 쓰시며 차례 상 차리는 법을 가르쳐 주시지만 우리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 마음속으로는 그저 먹고 싶은 음식의 순서를 정하곤 했다. 차례가 거의 끝나갈 무렵, 다 같이 무릎을 꿇고 조상님들이 음식 먹기를 기다리는 유식(侑食) 시간이 되면 우리는 괜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형제 중 누군가가 '킥킥' 웃기 시작하면 우리도 흘끔흘끔 아버지 눈치를 살펴가며 '흑흑' 웃음을 터트렸다. 차례가 끝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 시간이 되면 어른들께서 입에 제주(祭酒)를 대시는 동안 우리는 예쁘게 모양을 내어 자른 삶은 달걀을 먼저 먹으려고 기를 썼다.

아침 떡국을 먹으면서 우리는 자랑스럽게 나이를 한 살씩 더 보탰다. 식사 후 할머니와 부모님께 세배(歲拜)했고 어른들로부터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고 공부 잘하라는 덕담과 함께 세뱃돈을 받았다. 그 후 형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일가친척 및 동네 어른께 세배한 후에야 자유시간이 됐다. 그 후 점심시간도 잊은 채 윷놀이, 과자 내기 화투놀이 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