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하늘이 울고 땅이 울던 날
[칼럼] 하늘이 울고 땅이 울던 날
  •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부군수)
  • 승인 2020.07.18 20:5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부군수)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하늘이 잔뜩 흐리고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엊그제 장마비로 유등천과 갑천에 큰물이 내려간 후에도 비가 연일 시시 때때로 오더니 오늘마저도 기어이 내릴 모양이다. 오늘은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영웅 고(故) 백선엽 예비역대장의 안장식이 대전현충원에서 있는 관계로 날씨가 개기를 바랐는데 기대가 어그러지고 말았다.

나는 배불리 먹으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안장식에 참석해야한다는 의무감 같은 다짐을 어제부터 하고 있었다. 마침 어제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소식을 주고받는 단체 카톡방에 공주 사는 친구가 “안장식에 참석할 사람은 11시 30분까지 현장에 도착하자”는 글을 올려서 그 시간까지 대어갈 참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꼼꼼히 챙겨보니 현충원 정문에서부터 안장식이 열리는 제2장군묘역까지 걸어서가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당초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던 계획을 바꿔 아내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안장식장 근처까지 태워다 놓고 돌아오라고 했다. 내가 직접 차를 가지고 가도 되지만 멀리서 오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중식이라도 같이하며 반주를 한잔 할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진입을 막는 곳에서 내려 차를 돌려보내고 안장식장을 바라보니 아직 한참 거리다. 시간은 11시 20분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우산을 펴들고 앞에 가는 사람들을 따라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뒤에서 요란한 사이드카 소리가 들리더니 영구차와 유족들을 태운 버스가 들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안장식장은 저 멀리로 보였다. 정문에서부터 따지면 꽤나 먼 거리다. 걸어서 3-40분은 족히 걸리지 싶었다. 우의를 입은 수십 명의 군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외곽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을 꼭 이렇게 외진 곳에다 모셔야하나 하는 생각에 무언지모를 것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에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며 무너져 내리는 전선을 앞장서 돌격해 나라를 구한 영웅이 아니던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민병대 같은 병력 8000여 명을 이끌고 2만 명이 넘는 적 3개 사단에 맞서 싸워 이긴 장군이 아니던가. 백 장군이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적군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지금쯤 우리는 강냉이 죽이나 먹으며 김씨 왕조의 강압통치 속에 신음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바쁜 걸음으로 안장식장에 도착하니, 하늘도 슬픈 듯 어느덧 굵은 비를 내리고 있었다. 땅도 눈물비에 젖어 울고 만개한 무궁화 꽃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든 숙연한 모습의 사람들도 속울음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멀리 가까이, 여기저기 많이들 와 있었지만 예상보다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정부가 무관심하면 국민들이라도 관심을 가져야하는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궂은 날씨 탓이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서 백 장군의 영정사진이 모셔진 곳-식을 올리는 장소-까지 가려니 코로나 때문인지 여군들이 체온을 잰다. 내 차례가 되니 옆에 있던 한 남자 군인이 식장 내에 자리가 없다면서 입장을 막으려고 한다. 나는 그냥 서 있겠다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빗물 떨어지는 천막 가에 서서 안장식을 지켜보노라니 육군 군악대가 연주하는 음악들이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마음 한구석에 짠한 서글픔을 몰고 온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비록 목소리는 없었지만 음악이 슬프다. 연이어 이어지는 아리랑도 슬프고,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6.25 노래마저도 구슬프다.

국군통수권자도 총리도 국방장관도 없는 자리라서 더 슬픈 것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구국영웅을 이리 보내도 되는가, 백 대장의 업적에 비해 뭔가 소홀한 것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해리 해리스 미국 대사와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도 참석해 헌화를 하고 경례를 올리는데 우리 정부는 각료들이 다 오지는 못한다 해도 고작 보훈처장만을 참석케 한단 말인가.

같은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처절한 전쟁을 일으킨 게 누구란 말인가. 김일성 아니던가. 한편으로 전쟁을 이겨내고 나라를 지킨 게 누구란 말인가. 전쟁 후 70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국민통합을 이루지 못 하고 좌우와 진보·보수로 갈려 분열해야 하는 것인가. 이념 때문에 되지도 않는 억지 친일파 딱지를 붙여 이리 홀대해도 되는가 하는 아쉬움이 컸다.

6.25 때 함께 싸워준 미국이 “백선엽 덕분에 한국이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됐다”는 애도 성명을 냈다니 이만이라도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나는 솔직히 영웅을 영웅으로 알지 못하고 홀대하는 나라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를 생각하면 두렵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백 장군은 평소에 ‘그가 가리키는 전쟁터’로 서슴없이 달려가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과 학도병들과 탄약을 져 나르다 죽어간 민간인 지게꾼들에게까지 미안했던 모양이다. 평소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다부동을 비롯한 문산 파평산 등 전적지 8곳에서 파온 흙들이 하관 때 함께 묻히고 있었다. 이는 명장이며 덕장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와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친구들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찾는 것도 그랬지만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더 그랬다. 정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오느라고 늦었다는 친구들-공주와 청양 친구가 같은 차로 왔다한다-을 핸드폰 통화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19발의 조총과 고인의 명복을 비는 묵념이 이어졌다. 30여 분의 안장식이 모두 끝나자 하늘도 안도하는 듯 비가 그치고 있었다. 나는 고인이 편안히 영면하시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져 돌아오는 버스에서 비 그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분열의 남아공을 화해와 통합으로 이끌었다는 아프리카의 우분투 (Ubuntu) 정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we are.)'

우리도 국민통합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시대가 반드시 오고 세계사를 이끄는 주역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우리나라의 앞날에 밝은 태양이 뜨리라 굳게 믿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장신원 2020-07-19 12:31:29
힘냅시닷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