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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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 솔
  • 승인 2018.06.1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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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박춘우



6.13 지방선거 열풍이 대단하다. 금산 읍내 사거리는 물론 주요 도로 곳곳 선거 홍보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유세차량이 조그마한 우리 동네까지 와서 왕왕댄다.

5.16 군사정변 이후인 1963년 가을 어느 날, 이장님이 7장이나 되는 제5대 대통령선거 벽보를 우리 동네 디딜방앗간 담벼락에 밀가루로 묽게 쑨 풀을 발라 척척 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해 모여든 우리에게 이장님은 그 큰 퉁방울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이놈들 이 벡보 찢으면 감옥에 가니깨, 절대 손대지 말거라. 알아들 먹었지!"라고 말씀하시며 분명하게 다짐을 주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문맹자를 위해 후보자 기호가 세로 막대로 표시된 선거 벽보를 꼼꼼히 읽는 것이 우리의 일과 중 하나였다. 동네 아저씨들도 벽보 앞에 모여 큰 소리로 "그래도 황소가 힘이 세고 일을 잘한다." "군정은 나쁘고 민정이 좋다."는 등 나름대로 열띤 논쟁을 벌이다 나중에는 얼굴을 벌겋게 해서 서로 말다툼하기 일쑤였다. 우리 조무래기들에게는 7명의 후보 중에서 초등학교 4학년 중퇴 경력인 추풍회 오재영 후보의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 길 찾자!' 라는 구호가 가장 인기가 있었고 우리가 합창하듯 큰 소리로 외쳐대면, 어른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시곤 했다.

선거 전날 밤에 어른들은 이장님 댁 사랑방에 모여 막걸리를 거나하게 드셨고 선거 날 동네 어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장리 금남초등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 가서 이장님과 눈도장을 찍은 후, 밀린 외상 술값을 갚듯이 투표를 하고 오셨다. 오후에는 이장님이 일일이 가가호호 방문해 투표에 빠진 사람이 없나 꼼꼼히 점검하고 다니셨다.

선거가 끝나고 저녁에 개표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단 한 대뿐인 면장 아저씨 댁 라디오 개표 방송을 들으러 가셨다. 밤늦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라가 어떻게 될란지 걱정이다."라고 하시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면장 아저씨 댁을 다녀온 아버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우시는가 보다. 밤사이 쏟아진 농촌 표 때문에 16만 표 차이로 가까스로 이겼단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모습에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좋아하며 온종일 시시덕거렸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대통령 직접선거에 참여한 것은 6.29선언 후인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였다. 투표할 수 있는 나이가 한참 지났지만, 시절이 하도 어수선하던 때라 계속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았었다. 그 후 많은 민주 열사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으로 내 나이가 3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직접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었다. 그 후 선거는 우리의 보편화된 일상이 됐고 어렵게 쟁취한 그 소중한 가치를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고장 신문 시사기획 란에 한 수필가가 쓴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글이 내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자칫 선거가 무관심 속에 흐르고 투표율마저 떨어지면 민의가 왜곡될 수 있다. 따라서 기권은 금물이다. 지방자치의 꽃은 지역주민이 선거에 흔쾌히 참여할 때 피울 수 있음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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