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꽃 필 때
감자 꽃 필 때
  • 임 솔
  • 승인 2018.07.1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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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맛있는 햇감자가 한 상자에 5천원! 만원!, 맛있는 햇감자가 한 상자에 5천원! 만원!"

아파트 동(棟)입구 좁은 도로상에 주차한 작은 봉고트럭에서 녹음방송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하지만 한 상자가 5kg인지, 10kg인지, 아니면 20kg인지, 그 크기가 얼마짜리인지는 모르겠다. 또 상자의 크기에 따라 값이 다른 것인지, 같은 상자지만 감자의 크기에 따라 값이 다른지도 알 수가 없다.

감자 살 일이 없으니 감자 파는 사람에게 굳이 찾아가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맛있는 햇감자가 10kg 한 상자에 만원! 5kg 한 상자에 5천원!"하거나, "맛있는 햇감자가 10kg 한 상자에 큰 것 만원! 작은 것 5천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궁금함이 없이 쉽게 알아듣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는 공연하고 하릴없는 나의 생각일 뿐이고, 감자장사는 감자를 파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감자를 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상자크기나 감자 상태에 대해 무관심할 것이고, 감자를 사야할 사람은 어차피 트럭이 있는 곳까지 나가 상자의 크기와 감자 상태를 확인하고 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자장사는 방송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감자 값과 감자를 파는 위치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감자 파는 곳이 여기요! 하고 알리면, 감자가 필요한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나는 오늘도 누가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이다. 참 미련한 짓이다.

실없고 괜스런 생각에서 벗어나 문득 생각하니 하지(夏至)가 가까워져 햇감자가 나왔다 해도 '감자 값이 이렇게 많이 내렸나?'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감자 서너 알이 1만원이나 해서 감자 한 알이 전복 한 마리 값보다 비싸다 하고, 20kg 한 상자 값이 15만원이 넘어 시중의 감자탕에 감자가 없다는 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감자가 아니라 금자'라는 말이 언론에 비치기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질 좋은 삼광 쌀 20kg 한 포대를 5만원이면 살 수 있는데, 감자 한 상자가 미질 좋은 쌀 3포대 값보다도 비싸다니 비싸도 너무 비쌌던 것이다. 아무리 감자가 귀하다 해도 이렇게 비싼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쯤이면 예로부터 일러 내려오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 아니라, 아주 귀한 환금작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라는 씁쓰레한 생각까지 들었었다.

나는 어렸을 때 감자 꽃이 필 때면 늘 배가 고팠다. 그 때가 집집마다 식량이 떨어지는 청보릿고개였기 때문이다. 참밀과 보리는 알갱이를 눌러보면 아직 여물지 않아 하얀 즙이 나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수확을 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배고픈 것에 비해보면 계절로는 아주 좋은 시절이었다. 하얀 찔레꽃잎들이 한 잎 두 잎 흰 눈처럼 떨어져 찔레나무 밑이 잔설인 듯 희게 물들 때면, 시골집 가까이 그리 넓지 않은 밭에 감자 꽃이 피기 시작했다. 눈이 움푹 들어간 자주감자에는 자주색 꽃이 피고, 눈이 있는지 없는지 겉이 매끄러운 흰 감자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진녹색 숲에서는 한가로이 뻐꾸기가 목청껏 울었고, 비둘기는 '구구국 구국'대며 저음으로 청승맞게 울었다. 초가집 처마 밑 제비집에는 제비새끼들이 노란 주둥이를 벌리며 짹짹거리고, 제비는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분주히 드나들었다.

하지만 푸른 산천의 좋은 계절과 달리 쌀독은 비고 어머니의 소리 없는 한숨은 길었다. 보리를 베고 타작을 하려면 아직 멀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밑이 덜 든 감자라도 후벼다 먹어야 했다. 보리밥에 섞어서 먹기도 하고, 때로는 감자만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래도 배가 고팠다. 친구들-그 때는 동무들이라 했다-과 어울려 들과 산으로 쏘다니며 먹을 것을 찾았다. 하지만 이전에  즐겨 꺾어먹던 찔레는 이미 쇠기 시작해 맛이 없고, 산딸기는 아직 덜 익어서 따 먹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배고팠던 감자 꽃 필 무렵의 어린 시절이었다.

지금은 감자만으로 식사를 때우는 일은 없다. 감자 값이 아무리 비싸도 끼니를 굶을 일도 없다. 감자 값이 비싸면 당분간 먹지 않아도 아무런 탈이 없다. 나도 평소에는 감자 값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가 이번에 '감자가 금자'라느니 하면서 값이 너무나 비싸졌다가, 햇감자가 나오면서 갑자기 움푹 내렸다기에 관심이 갔던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감자로 끼니를 때우던 어릴 적의 배고프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 때의 인심은 지금보다 좋았다. 가난했지만 이웃 간에 떡 한 쪽이라도 울 너머로 나누어 먹었고,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내일처럼 돕던 옛 어른들이 생각이 나기도 한다. 사람의 행복감은 물질적 풍요로움에서 오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없이 살아도 훈훈하고 정겹던 감자 꽃 필 때의 인정이 그립다.

감자장사가 감자를 많이 팔고 갔는지, 허탕치고 떠났는지 모르지만, "감자 한 상자에 5천원! 만원!"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아파트가 왠지 적막하고 쓸쓸하다. 한편으로 감자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다가 갑자기 급락하며 요동치는 현상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내일은 만사휴무하고 기분전환도 할 겸 금산 내부리에 몇 줄 심어놓은 감자 밭에 감자 꽃이 피었나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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