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금산의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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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중앙신문
  • 승인 2018.10.0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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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면 삼태리 정충사 
남일면 삼태리 정충사
남일면 삼태리 정충사

정충사(금산군 향토유적 제19호)는 남일면 삼태2길 33-4에 있는 사당으로, 충신 양제(梁齊)를 모신 곳이다. 양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켜 큰 공을 세우고 적의 최후공격에 성이 빼앗겨 촉석루에서 남강에 투신자결한 충신으로 진주 창열사(彰烈祠)에도 배향돼 있다. 

남일면 삼태리 정충사
남일면 삼태리 정충사

 

옛날 선조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우리 나라를 침범하니 삼경이 모두 함락되고, 임금께서 의주로 파천하시니, 벼슬하던 신하들은 거의 도망가서 적을 향해 화살을 쪼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송재 양공과 같은 분은 비분강개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칼을 배어 책상을 치며 "내가 적의 목을 베기를 이 책상을 베는 것과 같이 하리라]"하시고, 창의사 김공 천일과 진주병사 최공 경회와 충청병사 황공진을 쫓아 힘을 다하여 적을 토벌하여 여러번 군공을 세우셨다. 이에 최와 황 두 공이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양공은 여러 장수의 으뜸이라]하고 순군 경적의 전략을 전적으로 맡겼다. 

마침 황공이 순절하게 되고 이튿날 비 때문에 성이 무너져 적군이 크게 쳐들어 왔으나, 공은 긴 돗대로 적을 많이 죽이고 곧 촉석루에 올라 북향하여 네번 절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소신은 힘이 다하고 성은 함락되었으니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죽사옵니다"외치고 물에 빠져 순국하니 만력 계사년 6월 29일이다. 가정 경술년 8월 29일에 탄생하셨으니 향년 44세였다. 이 사실이 충의실록에 실려 있다. 

숙종 신축년에 절도사 최진한이 포증을 나라에 계청하였고 영조 경신년에는 절도사 남덕하가 또한 나라에 계청하였으며, 3년 후 계해년에는 영의정 김재노가 경연 석상에서 주청하였다. 특별히 순절한 여러 신하들은 포창할 때에 공에게는 호조좌랑을 내리시고 충민사와 창렬사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공의 이름은 제이며 자는 제부요 관향은 남원이다. 시조의 이름은 능양이오 벼슬을 병부랑중이었다. 여러 대를 지나서 이름이 송조인 분은 벼슬이 봉익대부밀직사이었고 공의 칠세조다. 증조의 이름은 자안이요 숨어사는 훌륭한 선비로서 안동부사에 제수되니 벼슬이 서로 이어져 더욱더 빛났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우이오 벼슬은 좌랑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익상이오 벼슬은 순릉참봉이었다. 어머니는 단인 남양홍씨니 승지 계하는 그 분의 아버지이시다. 

성질이 온순하며 부덕이 있었다. 아내는 공인 해평길씨 수온의 딸로서 야은 선생 재라는 분의 재현손이다. 아들은 원길 덕길 이며 모두 통덕랑이오 형길이니 원길남은 구용이니 진사며 음사로 동중추가 되고 덕길남은 구사니 진사요 형길남은 통정대부이다. 중현이하는 쓰지 않는다. 

공은 날 때부터 기질이 특이하였으며 용모가 웅장하고 효도와 우애로 법을 삼았다. 또한 따뜻하고 공손함이 다른 사람보다 지나칠 정도이었고 가정의 교훈을 이어 받아 행실이 소문날 정도이었다. 손오의 병서를 즐겨배워 활쏘기를 잘 하였고 널리 경적에 통달하여 여러번 향해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다가 선조 무진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내금위장을 역임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자 상장제전을 한결같이 가례대로 시행하였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굳세고 분을 참지 못하였으니, 매양 역사를 읽다가 옛 사람이 절조를 세우고 의에 죽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어놓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말하기를 "통절하도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이 이와같이 분명하지 않으며 어지 대장부라 하리오"하였다. 

선조임금께서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곧 가서 임금의 수리를 호위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상중이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복을 벗게 되자 드디어 남아하기로 결심하고 손톱깍고 머리털을 끊어 두 아들에게 주며 말하기를 "내가 이미 복을 벗고도 국난에 나가 군부의 원수를 죽이지 않으면 나라의 은혜를 값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나의 목숨을 바칠 때이니 너희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어린 동생들과 같이 선대의 산소를 잘지키면 너희들은 우리 집의 효자가 되고 나는 국가의 충신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충신 양제(梁齊)를 모신 정충사는 1937년 지방 유림에 의해서 건축되었으며 해마다 음력 8월 12일 추향제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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