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독일마을과 미조항
나창호(수필가, 전 부여군부군수)
남해의 독일마을이 가을비에 젖고 있다.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 차 한 잔씩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하얀 벽과 어우러진 독일풍의 빨간 지붕들이 멋지다. 추석을 불과 며칠 앞둔 때이지만 아직은 녹색이 짙은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매년 1회 원거리 1박 여행을 하는 3가족 6명이 미조항으로 가는 도중에 독일마을에 잠시 들렸던 것이다. 물방울이 맺힌 유리창을 통해 물건항을 내려다보니 어스름하게 보이는 방파제 안쪽바다는 잔잔한데, 방파제 밖의 먼 바다는 흰 구름 속에 묻혀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포구 안쪽으로 초생달처럼 길게 펼쳐진 방조어부림이 보이고, 그 안으로는 옅은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농지들이 펼쳐져 있다. 바다와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독일마을이 조용하고 평화롭다.
독일마을은 우리나라가 가난에 허덕이던 60∽70년대, 젊은 나이에 파독되었던 간호사와 광부들이 은퇴하고 정착한 마을이다. 청춘을 낯선 이국땅에서 보내고 노년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이들이 땀 흘려 벌어들인 돈으로 그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국가도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간호사는 시체를 닦는 험한 일부터 했고, 광부는 탄광의 깊은 막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고학력자인 이들이 외화를 벌기 위해 희생한 것이다.
여기에 둥지를 튼 주민 중에는 한국인끼리 결혼한 경우도 있겠지만 독일남자를 만난 간호사도 있고 독일여자를 만난 광부도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면 좋겠다.
독일마을에서 독일음식을 맛보고 프랑스풍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도 있지만 아직 점심때가 아니고 당초 목적지도 여기가 아니라서 차 한 잔씩을 끝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삼동면 물건리에서 미조면 미조리까지의 물미해안도로는 들쭉날쭉 이어지는 급커브가 많은 길이다. 내비게이션이 연속 전방에 급커브가 있다는 주의를 준다. 빗속을 운전하는 집사람은 신경이 쓰이겠지만, 나는 금방금방 바뀌는 풍경이 보기에 좋다. 섬의 작은 들에 벼들은 누렇게 익고, 들 너머로 펼쳐진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보인다. 섬마을들이 고요하고 예쁘다. 나는 남해안에 올 때마다 나폴리보다도 시드니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해안선이 단순하지가 않고 아기자기한데다 무언지 모를 정감이 흐르기 때문이다.
미조항에 도착하니 비는 더 세차지고 점심때도 지났다. 미조항 남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근처의 ‘미조항 식당’으로 향했다. 멸치의 산지에 와서 멸치를 맛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멸치쌈과 멸치회, 멸치튀김에다 고등어구이와 민어조기구이가 나오는 한상차림이 3인분에 66,000원. 여자들 한 상, 남자들 한 상, 두 상을 차려서 술을 한 잔씩 곁들이니 배고프던 차에 꿀맛 같다. 멸치쌈은 담백하고, 멸치회무침은 새콤해서 술안주로도 제격이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데 식사 후에는 숙소에 짐을 풀고 해상산책길을 다녀오자고 입들을 모은다.
하룻밤 묵을 해모로 펜션은 널찍한 광장 북쪽 끝 한켠에 전면은 바다를 향하고 후면은 도로를 접하고 있었다. 숙소에다 짐을 풀고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비가 조금 수그러드는 기미를 보아 비닐우의차림에다 우산을 하나씩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미조항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해상산책길이 보이지 않는다. 광장을 지나고 식당가를 지나 미조면사무소 앞을 지날 때쯤, 한 행인에게 위치를 물으니 남쪽을 가리킨다. 우리 숙소가 있는 곳은 미조항 북항이고, 해상산책길이 있는 곳은 미조항 남항이란다. 북항은 연안여객선과 유람선이 주로 기항하고, 남항은 어선들이 기항한단다. 조금 더 가니 남항이 나온다.
빨간색이 돋보이는 해상 데크길은 서쪽 끝 팔랑마을 앞에 있었다. 포구의 양쪽으로 산이 길게 뻗어 팔(八)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물결(浪)을 더해 마을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안내판을 보니 ‘아름다운 어항 미조항을 한눈에 조망하고 해상산책로를 통해 미조 어민의 생생한 삶의 일부인 멸치털이를 인근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고 적혀있다. 바다로 뻗어나간 산을 따라 설치된 데크길에 들어섰다. 비가 내려서인지 관광객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데크 난간에 멸치산지답게 작은 멸치형상들을 붙여 놓은 게 이채롭다. 우측난간에 달린 멸치 떼 형상은 사람 가는 방향으로 대가리가 향하고 좌측난간에 달린 멸치 떼 형상은 대가리가 반대방향이다. 투명한 유리바닥을 지날 때는 출렁이는 바닷물이 내려다보이는데 어린이들이 오면 좋아할 것만 같다. 중간쯤에 2층 전망대가 둥글게 서있어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비 내리는 속에 고요한 미조항의 경치가 멋지다. 마을과 산과 바다와 멀리 보이는 섬들까지.
조금을 더 가니 멸치털이 전망대가 나온다. 바다에는 사각의 넓은 목판들이 마치 바지선처럼 여기저기 고정돼 있다. 하지만 멸치 철이 지나서인지 수많은 멸치들이 은빛으로 번쩍이는 멸치털이의 멋진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곧 산책길이 좌로 가로놓인 긴 방파제와 연결된다. 방파제 끝 조금 못 미친 곳에 이르자 커다란 멸치형상으로 의자를 해놓은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우산을 든 채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추억을 담는다는데 어쩌랴, 함께 찍어야지. 서방파제 끝에는 흰색의 등대가, 건너다보이는 동방파제 끝에는 빨간색의 등대가 서있다. 몸은 아담하지만 칠흑 같은 밤, 어선들의 안전한 뱃길잡이가 되리라.
비가 오는데다가 바깥 바다와 가까워서인지 바람까지 불어 춥고 몸도 어설프다. 구경이 시들해진 우리는 서둘러서 갔던 길을 되짚어 숙소로 돌아왔다. 신발과 아랫도리가 흠뻑 젖고 양말까지 축축하게 젖어서 따분하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창밖을 내다보니 미조항에 가득 매인 선박들이 물결에 흔들리며 삐걱댄다. 나는 아침에 올 때만해도 ‘아침이 아름다운 미조항(美朝港)’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미륵이 도운 마을’ 전설을 지니고 있어 미조항(彌助港)이란다.
아까 산책길에서 돌아올 때 보니 도로에 접한 광장에 ‘국도 19호선, 국도 3호선 출발점’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표지석에 따르면 총길이 451.55km인 국도 19호선은 종점이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이고, (남쪽의) 길이가 564.17km인 국도 3호선은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이 종점이란다. 나는 여기에 와서 처음 알았는데 이것도 여행하는 재미지 싶다.
하필 비가 내려 여정이 축소되고 여행하는 재미가 덜한 아쉬움 속에서 하루가 저문다. 집사람들이 장만해온 여러 가지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남자들끼리는 술 한 잔씩을 더 하며 피로를 풀었다. 미조항의 푸른 등댓불은 끊임없이 깜박이고, 비 오는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