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호기심과 여행
두 돌을 갓 지난 외손녀를 돌보다보면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많다. “이게 모지?” “이거는 모지?” 하며 끊임없이 물어댄다. 어떤 물건을 가리키며 물으면 대답이 비교적 수월한데 어느 때는 대답하기가 곤란한 경우도 있다. 냉장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게 모지?” 하길래 “냉장고” 하니, 이번엔 손가락으로 냉장고 온도가 표시되는 곳을 콕 짚으며 “이거는 모지?” 한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잠시 망설였다. 아이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어서다.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며 뜸을 들이니 자꾸 되물어서 얼떨결에 “온도판” 했다. 그러자 아이가 “온도판?”하고 되물었다. 나는 “응”하고 대답했지만, 뒤 늦은 생각은 그냥 “냉장고온도”라고 대답하는 게 나았지 싶었다.
이처럼 아이가 자꾸 묻는 것은 왕성한 호기심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의 아이가 자라면서 알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호기심은 어린아이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 단지 얼마나 왕성한가, 미미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리거나 젊을 때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나이가 들면 줄어들기 마련이다.
피터 드러커는 “인간은 호기심을 잃으면 늙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육체적인 움직임이 둔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의욕과 호기심이 줄기 마련이다. 몸과 정신이 함께 늙는 것이다.
나는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이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70 중반의 나이지만 아직 안 가본 곳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여행은 일상생활에 시달린 심신을 달래주기도 하지만,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한 번 다녀온 곳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몇 번씩 다시 찾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새로운 곳을 찾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어린이날에는 친구 내외와 함께 충남의 관광지를 돌아보았다. 그동안은 강원도나 남해안 등 주로 먼 곳을 다녔었는데, 이번은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을 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먼 곳을 다녀오려면 하루 이틀을 현지에서 머물지 않는 한, 오가며 도로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많았고, 밤늦은 시간에야 겨우 돌아올 수가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까운 명소를 두고 먼 곳으로 돈 면도 없지는 않았다.
아산의 영인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경이었다. 그새 주차장이 꽉 차서 주차면을 벗어난 빈 공간에 겨우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영인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숲이 좋고 산책하기에 좋았다. 등산로가 아닌 도로 옆의 데크를 따라 걷자니 오월의 푸른 물이 옷에 배는 듯싶고 마음도 개운해졌다. 넓적한 참나무 잎 그늘도 좋고, 연보랏빛 오동나무 꽃도 보기에 좋았다. 나는 문득 숲속 야영장에서 하루 밤을 묵으며 영인산을 여유롭게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숲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상투봉 정상이 보이는 곳에 이르니 널따란 잔디 광장이 펼쳐지고 주변 산은 온통 희고 붉은 철쭉 꽃밭이었다. 꽃철을 제대로 못 맞춘 탓에 꽃들이 일부 진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여기에도 이렇게 넓은 철쭉 꽃밭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오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한동안 숨을 고르며 머물다가 갔던 길을 되짚어서 내려왔다. 어느새 점심때가 훌쩍 지났던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인근에 위치한 피나클랜드였다. 오후 세 시가 넘은 시간에 랜드 입구께의 한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는데, 식당사장이 우리들이 하는 소리를 듣더니 지역주민 할인권을 준다. 1인당 입장료가 15000원인데 지역민 할인 3000원에 70세 이상 할인 2000원을 중복 할인 받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피나클랜드는 산책하며 꽃구경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수많은 종류의 꽃들로 여기저기 넓은 꽃밭이 조성돼 있었다. 눈길마다 꽃이었다. 여러 색상의 팬지, 키 작은 백일홍과 맨드라미, 사철국화, 장미, 튜울립과 수선화(일부는 꽃이 지고 없었다)를 비롯해서 이름 모를 꽃들이 즐비했다.
산책로 정상부위에는 옛 채석장에 높다란 인공폭포와 작은 연못을 조성하고, 주변에 쉴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피나클랜드는 아산만방조제 축조 때 토석을 채취하던 자리란다. 산을 통째로 들어낸 공간을 활용해서 조성했다는 것이다. 꽃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주차장에 그 많던 차량들도 거의 빠지고 북적이던 주변도 한산해졌다.
늦었지만 천안의 태조산 각원사로 향했다. 아산시내와 천안시를 거치자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해가 설핏해서야 각원사 태조산루 앞마당에 차를 댈 수 있었다. 누각 밑 계단을 오르니 누각바닥에 엄청 큰 치미가 놓여있었다. 대웅보전에 쓰인 것과 동일하단다. 이내 넓은 마당이 나오고 정면으로 웅장한 대웅보전 건물이 보였다. 높다란 계단을 올라가서 대웅보전 왼쪽 옆으로 난 몇 십 계단을 또 오르니 드디어 청동대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15m, 둘레 30m, 청동무게 60톤, 귀 길이만 175cm. 동양최대라는데, 앞뒤 옆 어느 곳에서 봐도 거대하고 웅장했다.
정면에서 보니 대불좌대 높이로 단상을 설치해 놓고 앞에 가림막을 해 놓았다. 가림막 상단에는 5월 9일의 ‘제 17회 대불부처님 목욕의식 대법회’라고 쓰여 있는데, 그 때 사용할 연단인지, 몸 씻기 때의 용도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부처님은 중생들 마음의 때를 씻어주고, 중생들은 대불부처님의 몸때를 씻어 주는 것인가?
그렇게 청동대불을 친견하고 내려오는데 성종각의 20톤 대종이 크게 울었다. 묵직하게 울리는 대종소리를 뒤로하면서 귀로에 올랐다. 그날 나는 영인산과 각원사 청동대불에 대한 마음속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