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세월이 이렇게 빠른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딘 줄로만 알았다. 초등학교 때의 여름방학은 한 달이 무척 길었고, 겨울방학의 한 달도 무척 길었다. 무더운 여름날, 마을의 정자나무 그늘에서 어른들- 환갑을 넘긴 사람이 드물었다. -이 주고받던 “세월 참 빨라.”, “빠르고말고, 쏜 살 같지.”와 같은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덧 고희를 수년이나 지난 나이를 먹은 내가 세월의 빠름을 몸으로 느끼면서 옛 어른들의 말을 입버릇처럼 따라하고 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 “세월 빠르다”는 얘기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5년 가까이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였다.
개개인에게도 다사다난했겠지만 나라에 온통 험난한 일이 많았던 을사년 푸른 뱀의 해가 가고, 병오년 붉은 말의 새해가 온다고 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갔다. 젊은 사람들은 새해 해맞이를 한다고 일출명소를 찾아 먼 곳에까지 가기도 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럴 엄두조차 내지를 못했다. 나이 탓인지 움직이기가 싫었고, 해 바뀜에 대한 어떤 감흥이 일지도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또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월의 빠름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교차점에서의 느낌이 더 새삼스럽고 더 빠르게 인식되어진다. 아마도 12간지의 띠가 바뀌고 나이를 한 살 더 먹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월은 돌 징검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살처럼 빠르고, 흰 구름 속을 가는 둥근달처럼 빠른지도 모르겠다. ‘쏜살같다’는 말처럼 명사수가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른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람의 일생은 백마가 문틈사이로 스쳐가는 순간처럼 짧다는 말도 있으니 쏜살보다 더 빠를 수도 있겠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알면서도 눈으로는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세월에 대한 느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빠른 것 같다. 나의 느낌도 그렇다. 햇볕이 반가운 추운 겨울이었다가도 어느새 그늘을 찾아야 하는 더운 여름이 오니 말이다. 지금처럼 새해 초에는 해 바뀐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잠깐 새에 또 한 해의 끝자락이 올 것이다.
지금의 순간이 가장 젊은 때라고 나이든 사람들은 말한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잔뜩 주름진 얼굴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 가장 젊은 때임이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불과 두세 해 전의 여행 중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그때의 얼굴이 훨씬 젊어 보인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미세하게라도 늙음은 멈추는 일이 없고, 시간 역시 한순간도 멈추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자기 얼굴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지가 않다. 또 자주 만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얼굴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의 변화된 얼굴을 쉽게 감지할 수가 있다. 예전의 얼굴 기억과 다시 만났을 때의 얼굴 모습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은 미세한 변화들이 누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가끔 TV방송에서 옛날에 이름깨나 날리던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배우나 탤런트 같은 인사들의 부음을 접할 때도 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계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생로병사가 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이 그동안 있어왔던 불변의 진리고 사실이라면 이에 순응하며 살아갈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주름은 더 깊어지고 신체는 더 노쇠해질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도 노인의 주름살을 지워서 젊은이로 바꿀 수는 없고,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늙음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이가 들만큼 들었으면 삶에 대한 욕심을 더 품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다. 나도 이제 옛사람들에 비하면 서운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 더 이상 욕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나옹선사의 청산가가 떠오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내가 이름 높은 나옹선사의 고귀한 삶처럼 살 수는 없으나 흉내라도 내고 싶다. 붉은 노을 지는 석양 속 낙엽 지는 길을 즐겨 걷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낙엽 지듯이 가고 싶다. 내게 너무 과분한 욕심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