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가지씩 삶을 퍼내던 아버지”
류상현 (사)희망의언덕 대표
사람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쯤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나에게는 겨울 들판에서 아버지와 함께 물고기를 잡던 날의 기억이 그렇다.
벼 베기가 끝난 들판은 텅 비어 있었고
논두렁 사이 작은 웅덩이에는 살얼음이 얇게 얼어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판을 스쳐 지나가던 날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웅덩이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여기 물고기가 있다.”
어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웅덩이에는 물이 가득했는데,
그 속의 물고기를 어떻게 잡는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바가지를 들고 웅덩이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논두렁 한쪽을 막아 놓고 한 바가지, 또 한 바가지 묵묵히 물을 퍼냈다.
나는 물었다.
“아버지, 이 물을 다 언제 퍼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으셨다.그리고 다시 바가지를 들어 물을 퍼냈다.
겨울 들판이었지만 아버지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맺히고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한참이 지나자 웅덩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진흙 속에서 미꾸라지가 꿈틀거렸고 작은 개구리들이 튀어나왔다.
어린 나에게는 마치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신기한 순간이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버지의 손이었다.
두툼하고 거칠었지만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든든한 손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손을 잊지 못한다.
요즘 어머니는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신다.
어머니는 그곳 이야기를 할 때마다 참 즐거워하신다.
“우리가 젊을 때는 참 고생하며 살았지.
배도 많이 굶고 가뭄 때문에 농사짓기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런데 이제는 나라에서 주간보호센터도 만들어 주고 차로 데리러 오고 밥도 먹여 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어머니는 그곳에서 친구도 만나고 노래도 부르며 하루를 보내신다.
그 모습을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문득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 고생을 함께 하셨던 아버지는 예순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날 아버지가 퍼내던 것은 웅덩이의 물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식에게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퍼내고
삶의 무게를 퍼내고
당신의 힘을 퍼내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세월은 많이 흘렀다.
세상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마음이 지치고 걸음이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겨울 들판의 그 장면을 떠올린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아무 말 없이 한 바가지 또한 바가지
묵묵히 물을 퍼내던 아버지의 손을.
그리고 그때 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아버지가 평생 우리 가족을 위해 퍼내셨던 것은 웅덩이의 물이 아니라
자식들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던 삶의 무게였다는 것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