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광릉국립수목원과 광릉
[수필]광릉국립수목원과 광릉
  •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23.02.15 22: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천연기념물 크낙새가 산다는 경기도 포천시 광릉국립수목원을 친구네와 함께 찾았다.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인원만 방문이 허용되는 곳이라서 사전에 절차를 밟아야했다. 초행길이라 대전에서 일찍 출발한 관계로 방문예약시간보다 2시간이나 먼저인 낮 12시 경에 도착했는데도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가득했다. 겨우 빈 곳을 찾아 차를 대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수목원은 조선조 7대 왕인 세조의 무덤 광릉에 부속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면적이 무척 넓었다. 우리는 정문을 조금 지나서 생태숲길로 들어섰다. 친구네가 마련해온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와, 으름넝쿨을 비롯한 식물들이 자연스럽게 보존되고 있는 생태 숲이 보기에 좋았다. 테크 길을 조금 걷다가 비교적 넓게 마련된 한적한 휴식공간에서 점심부터 해결했다. 먼 길 오느라 시장했던 탓인지 밥맛이 무척 달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생태숲길을 마저 가니 전나무숲길이 나왔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2013년 제 68회 식목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전나무를 기념 식재했다는 작은 표지석이었다. ‘아! 박근혜 대통령도 여기를 다녀갔구나.’ 나는 어이없는 탄핵으로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 대통령이 생각나서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지만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기旣 조성되어있는 전나무 숲길은 200m 정도 되었는데 나무들이 아주 우람했다. 강원도 월정사 전나무 숲에서 1923-27년까지 씨앗을 가져와 증식해서 조성했다는 안내판이 길옆에 서있었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시대에 조성된 숲이었다. 전나무에서는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는데 그래서인지 숲길을 걷는 동안 공기가 무척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 수목원을 두루두루 돌아봤지만 시기적으로 조금 늦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갑작스런 추위가 왔는지 고와야할 단풍나무 잎들은 마른 채로 볼품사납게 붙어 있고, 버드나무와 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목 대부분은 잎들을 모두 떨어뜨린 채 앙상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열대식물자원연구센터를 관람할 때는 식물이름인지 학명인지를 영어로만 써놓아서 아쉬웠다. 산림박물관을 돌아볼 때는 나무에 관한 많은 것-목재에서 뿌리, 염료식물까지-을 보고 느꼈지만, 역시 나에게 반가운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7.4.5에 쓴 治山治水(치산치수) 휘호가 넣어져 전시된 액자였다. 그 분이 아니었으면 헐벗은 우리나라의 산림이 지금처럼 울창해졌겠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목원을 보고나서는 광릉을 보러갔다. 광릉은 수목원에 오기 전 길목에 있었는데, 먼저 보고 수목원을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거꾸로 찾는 셈이었다. 모두가 초행길이라서 잘 몰랐던 탓이다. 광릉은 세조와 그의 부인 묘를 합쳐서 그리 부른다는데, 남양주시市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매표를 하고 광릉입구로 가니 ‘대소인은 누구나 말에서 내리라’(大小人員皆下馬)는, 아직도 글씨가 또렷한 하마비가 서있었다. 한 동안 단풍숲길을 따라가다가 홍살문을 들어서자 묘들이 보였는데 꽤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조의 묘는 왼쪽에 있고, 그의 부인 묘는 작은 산골을 건너 오른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묘는 왜 그리 높이 써놓고, 한참 아래쪽에 붉은 나무판자울타리를 쳐놓았는지 모르겠다. 봉분 꼭대기를 올려보고 있자니, 오래전 서울생활을 잠시 할 때,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 이방원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을 계단으로 올라가 가까이서 보았던 일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세조는 겨우 13년을 집권하려고 그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던가? 붉은 빛 산골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친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동복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이고, 이복형제 3명을 죽이고, 정승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죽이고,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을 참혹하게 죽이고, 그러고도 집권 후 정권의 안정을 기하지 못해 난을 평정하느라 또 무수한 살육을 했으니, 능 주위에 늠름한 푸른 소나무는 드물고, 누런 잡목들만 서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숱한 사람들을 죽였으니 그의 말로 또한 편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야사에는 세조가 문둥병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1984년에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동자상(문수보살상)에서 여러 복장유물이 나왔는데, 그중에 피고름에 찌든 특이한 속적삼이 나왔다고 한다. 소매길이로 보아 남자 옷이었고, 문헌 등을 추적해보니 세조의 속옷일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이로 보면 세조는 속설대로 문둥병을 앓았거나, 문둥병은 아니라도 지독하게 고통스런 피부병을 앓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무참한 살육의 죄과를 치르는 인과응보가 아니었을까?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도 수양이 쿠테타를 망설이자 갑옷과 칼을 받쳐 들고 결행할 것을 부추겼다니 여장부일 것임이 틀림없다. 장자가 아닌, 어린 성종을 세우고는 6년인가를 수렴 첨정했다니 이로 보아도 인물됨을 알 수가 있다. 그녀 역시 말년에 병이 들어 온양온천으로 치료차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니 쌓은 업보는 없는지 모르겠다.

광릉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아무리 권세가 좋다 해도 궁극에는 부질없는 짓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사가 별 건가? 어차피 한 줌의 흙인 것을...

다음 행선지 강원도 철원으로 향하려는데 해가 저물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