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 6.25때 남일면 음대리로 피신했던 딘소장이야기
[특별취재] 6.25때 남일면 음대리로 피신했던 딘소장이야기
  • 장성수 기자
  • 승인 2023.06.16 2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 남침 전쟁 중 약 15일간 실종됐던 딘소장 어디 있었나?

[초청대담]

패널: 박범인 금산군수, 김원규 전 음대리노인회장, 장종안 전 남일우체국장

진행: 강명이 기자

본 영상은 1950년 6.25 전쟁 중 미육군 제24 사단장이었던 월리엄 딘 소장이 대전서 후퇴하던 중 금산방면에서 길을 잃고 약 15일간 실종됐던 행적을 당시 16세였던 김원규(87) 전 음대리노인회장의 생생한 증언을 근거로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 역사기록에 한국인의 밀고로 딘소장이 북한군에 잡혀갔다는 점만 부각되어 있는 부정적인 역사를 바로 잡아 밀고한 한국인도 있지만 목숨걸고 딘소장 일행을 숨겨준 한국인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아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일보 출신 원로 언론인 문창재 칼럼니스트가 쓴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이란 제목의 글 중 일부를 발췌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참전, 인민군 남진을 저지시키기 위해 항공편으로 보낸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참패했다. 뒤따라온 미 24사단 역시 평택-안성 저지선, 천안 저지선, 금강 저지선에서 차례로 밀려 ‘대전 사수’가 급선무가 되었다. 워커 8군 사령관은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에게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포항에 상륙할 해병 1사단을 추풍령 전선에 배치할 시간을 벌어달라는 것이었다.

야크기 지원을 받은 적 제3, 제4사단이 경부 축선을 따라 밀물처럼 치고 내려왔다. 교통의 요지인 대전은 옥천 유성 논산 금산 조치원 등 5개 지역으로 분기되는 도로망을 갖고 있어 수비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딘 장군 요청으로 최신형 대전차포가 왔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병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력 부족에 지리가 어둡고 훈련이 되지 않은 부대는 지휘관들까지 앞에 나서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천안전투에서 34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이 전사하자, 딘 장군은 바주카포를 메고 일선으로 달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용명을 떨친 이 포병 전문가는 직접 바주카포를 쏘아 적 전차를 파괴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병력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전차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들이닥쳤다.

시가지 혼전 중에 그의 사단은 통신장비마저 불통 되어 부대 간 연락이 끊겼다. 원래는 지연 작전이 19일 밤까지로 예정되었지만, 하루가 연장되었다. 20일 악전고투 끝에 연락병을 투입해 철수 명령을 내린 딘 소장은 인접 병력을 모아 50여 대의 차량 편으로 철수 길에 나섰다.

바로 이때 돌이키지 못할 실수가 발생했다. 운전병이 옥천-영동 방향으로 좌회전해야 할 길을 지나쳐 남쪽으로 계속 달린 것이다. 그리고 곧 첫 번째 위기가 닥쳤다. 길가에 매복했던 적의 공격으로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딘 소장은 몇 사람의 대원과 함께 산속으로 피했다. 그중에 부상병이 포함되었다.

부상병이 심한 갈증을 호소하자 딘 소장은 물을 찾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다 아래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기다리다 지친 대원들이 떠나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은 그는 혼자 산야를 헤매었다. 

그러다가 역시 혼자가 된 동료를 만나 함께 행동했다. 산짐승이나 다름없는 도피 생활이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 별자리를 보고 동쪽으로 간다는 게 제자리를 뺑뺑 돈 적도 있었다. 허기를 달래려고 밭에 버려진 날감자를 먹고, 갈증이 나면 빗물을 마셨다. 그게 탈이 되어 심한 이질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천사를 만났다. 전북 무주군 적상면 한 농가에 들어가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집주인(박종구)은 음식을 차려주고 정성스레 돌봐주었다. 그 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길을 나섰다가 악마를 만났다. 키 작은 중년 남자 둘에게 대구까지 길 안내를 해 주면 100만 환(1,000달러 상당)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들은 “오케이!”를 연발했다. 그들을 따라가다가 10여 명의 청년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불문곡직 딘 소장을 결박해 진안군 어느 파출소로 끌고 갔다. 미리 신고를 했던 모양이다.

포로가 된 딘 소장은 전주를 거쳐 대전으로 압송되었다가 평양으로 끌려갔다. 국군의 북진 때는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江界·평북)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포로 신문 과정에서 신분을 감추느라 심한 고초를 겪었다. 44시간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도 당했다. 90㎏ 가깝던 거구가 58㎏이 되었을 정도였다.

중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