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이재'의 추억
'일흔이재'의 추억
  • 임 솔
  • 승인 2018.03.2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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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금산 고향집을 갈 때나 고향집을 떠나올 때나 자동차로 일흔이재를 넘을 때면 어릴 적의 추억에 빠져들곤 한다.

일흔이재! 옛날에는 건장한 사람 일흔 명이 모여야만 넘을 수 있었다는 재다. 그만큼 흉한 도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릴 때 이런 얘기를 들으면 산들이 모두 민둥산이어서-도둑들이 숨을 만한 숲이 안 보여서-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른들은 옛날에는 나무가 무지무지 많았다고 했다.

아마 그 때 어른들도 앞의 어른들로부터 들었을 것이고, 앞의 어른들도 그 앞의 어른들로부터 들었을 것이며, 그 앞의 어른들은 또 그 앞의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일 것이다.
이 재의 또 다른 이름은 이루리재다. 어려서 우리는 그냥 이룰재라고 불렀다. 옛날 시골 사람들이 '재를 넘어 외지로 나가야만 큰 뜻을 이룰 수 있음을 염원했던 말이 아닌가'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은 몸이 훌쩍 커서야 들었다. 농사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 담기지는 않았을까.

이 재는 군북면 소재지가 있는 중구역과 금산-대전간 국도 쪽의 외구역을 연결하는 비교적 높은 재다.

이 재를 넘어야만 금산장을 볼 수 있어서 당시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무척 많았다 한다. 짐작컨대 소금 장사도 넘고, 새우젓 장사도 넘고, 제사장 보러가는 할머니도 넘고, 소 팔러 가는 사람도 넘고, 소 사러 가는 사람도 넘고, 명절 때 아이들 옷 사러 가는 사람도 넘고, 농사철에 일꾼들 반찬 장만하러 가는 아낙도 넘고, 장 구경을 핑계 삼아 단골집에 술 먹으러 가는 한량도 넘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제원을 거쳐 금산읍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북쪽으로는 추부로 통한다-가 있기는 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 도라꾸(트럭)가 뿌연 먼지를 날리며 지날 뿐이고 버스는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이 길이 포장된 지 오래고 수시로 차들이 오가고 있다. 나는 일흔이재를 돌 지난 두 살 때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처음으로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처음엔 서 너 살 때가 아닌가 생각됐지만 어머니께 확인해봤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며칠을 몹시 앓다가 금산읍에 있는 병원에 간 것으로 기억한다.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 등에 업혀 재를 넘을 때 뻐꾸기가 많이 울었던 것만은 기억이 생생하다.

"뻐꾹 뻐꾹 뻐뻐꾹 뻑꾹"하며 울었다. "뻐꾸기 운다. 뻐꾸기 운다."며 칭얼대는 어린 자식을 등에 업고 한편으로 달래면서 재를 넘는 어머니는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다. 날은 더운데다 자식 놈은 고열에 칭얼대며 늘어지기까지 하니 얼마나 무거웠을까. 더구나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혹시 큰 병은 아닐까' 걱정하며 넘느라고 애도 많이 탓을 것이다.

병원에서 팔뚝만한 주사기를 보고 울며 기함을 하니 어항속의 빨간 고기-커서야 금붕어인줄 알았지만-를 가리키며 달래주던 기억도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그 때 무슨 병을 앓아서 금산읍내 병원에까지 가야했는지는 모른다. 죽을 뻔했지 않았나 생각될 뿐이다.

어머니도 내가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알려줬는데도 앓고 난 후라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로 재를 넘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아주 어렵게 사는, 당시 우리 또래 어떤 아이의 일기를 바탕으로 제작한 실화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담임선생님 인솔 하에 학급전체가 단체로 넘어가서 지금은 없어진 금산극장에서 흑백 영화로 봤다. 영화가 너무 슬퍼 참 많이도 울었고, 영화를 보고나서는 슬픈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온 길을 되짚어 재를 넘었다. 넘어갈 때는 '영화 본다'는 생각에 너무 좋아서 고된 줄을 몰랐고, 넘어올 때는 영화 얘기로 고된 줄을 몰랐다.

다음에는 금산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새벽밥을 먹고 동네 친구와 선배와 같이 이 재를 넘었다. 새벽밥을 먹자마자 어둠속에 묻힌 집을 나와 바쁜 걸음을 걷다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오르게 되고, 날이 훤히 밝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금산읍에 하숙을 정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넘었고, 토요일에는 낮에 넘었다.

또 외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불짐을 지고 눈길을 넘었던 기억이 나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여름과 겨울방학 때나 집에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일흔이재에 대한 추억이 어릴 때보다는 덜하다. 이 때는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추억이 깃든 일흔이재지만 지금은 나무숲이 너무 우거져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지금의 도로가 옛길을 따라 나지 않고 일부 구간이 다른 방향으로 꺾어져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경사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산 아래 바리실 마을과 연계해 도로를 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근 한 시간 가까이를 걸어야 넘을 수 있었던 재를 지금은 자동차로 5분도 안 돼 넘는다. 격세지감이 크다. 빨라서 좋기는 하지만 산길 따라 열리는 아기자기한 이야기와 낭만은 없다. 공동묘지 앞 휘도는 길의 무서움도 없고, 고개 정상의 나무 그늘에서 땀 식힐 때 불어주던 산들바람의 시원함도 느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옛날로 돌아가라 하면, 나는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자동차의 빠름과 편리함이 몸에 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 마음의 간사함 아닌가 싶다. 옛 추억은 마음속에 있을 때나 즐겁다.

일흔이재 옛길이 흔적 없이 사라졌어도 내 마음속에는 추억과 그 무언지 모를 아련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자동차로 일흔이재를 넘을 때마다 정해진 순서 없이 제각각 떠오르는 추억이 있어 나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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