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 임 솔
  • 승인 2018.04.0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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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박춘우



고향에 돌아와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는 아내와 봉황천 뚝방길을 걷는 것이다. 봉황천은 무성한 갈대숲으로 뒤덮여 예전의 금모래 은모래를 볼 수 없는 것이 서운하지만, 그래도 연두색 옷을 갈아입고 봄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는 수양버들이 정겹다. 

나이가 나보다 열한 살이나 위인 누나는 우리 집 칠 남매 중 맏이였다. 어릴 때부터 불거진 눈두덩만큼이나 욕심이 많아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삐치기를 잘하는 나를 달래주는 데 선수였다. 누나는 내가 서너 살 때까지 노상 나를 업어 주었다. 화가 날 때마다 나는 누나의 등 뒤에서 엉엉 울면서 누나의 치렁치렁한 뒷머리를 잡아당겨 아프게 했지만 "추누야! 누나 머리 다 뽑히면 절에 가 중이 돼야 하는 디, 그래도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었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누나 몸의 일부라고 여겼을 정도로 나는 누나와 붙어살았다.

개구쟁이 유년시절, 봄이 되면 누나는 나를 데리고 산나물을 뜯으러 가서는 삐삐를 뽑아주고 잔대를 캐주어 나의 굶주린 배를 불려줬고 진달래꽃 방망이를 만들어 주었다. 단옷날에는 둘이서 뒷동산 큰 소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은 권디를 타다가 배가 출출하면 종그락을 들고 뽕나무 오돌개를 따러 다녔다. 여름날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 네 잎 크로버 찾기 내기를 했으며, 이내 지치면 하얀 토끼풀 꽃으로 시계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는 날이면, 속에 단팥이 든 찐빵을 쪄주어 나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날은 누나가 뜨개질해서 만들어 준 장갑을 끼고 함께 눈사람을 만들며 놀았다.

그 후 내가 초등학교 삼 학년이었던 어느 눈 쌓인 겨울날, 산토끼 사냥을 한답시고 이산 저산 형들을 따라 소리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다가 배가 고파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 집에 손님들이 와 계셨다. 누나는 우리 집 재간 옆 대나무 울타리 숲에 숨어 있었다. 근동 새미실 사는 어른들이 누나를 선보러 온 것이라고 했다. '누나를 선보러 왔는데 왜 숨어 있을까?' 의아해하면서도 명절날이나 얻어먹는 맛있는 소고깃국 점심에 정신이 팔렸었다.

누나는 스물한 살에 시집을 갔다. 혼례식 날 아침, 매형은 조랑말을 타고 우리 집 사립문에 들어서면서 호박을 호기롭게 내리쳐 깼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치알을 치고 혼례상이 차려진 우리 집 마당에서 왕비처럼 화려한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쓴 누나는 양옆으로 들러리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사모관대를 착용한 매형과 맞절을 하고 표주박에 담긴 술에 입을 대는 등 전통 관례대로 혼례를 치렀다. 밤이 되자 방 뒷문의 문살에 매달려 있는 호기심 많은 동네 아낙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누나는 매형과 주안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동도 없이 한참을 인형처럼 앉아 있다가 어머니가 불을 끄자 이내 조용해 졌다.

다음 날 아침, 동네 앞 길게 늘어진 수양버들 실가지가 하늘하늘 춤추는 길을 따라 누나는 꽃가마를 타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 떠나기 전 누나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추누야! 열심히 공부해서 이담에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 알았지?"하고 울먹이며 말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도 누나에게 "시집가면 아무리 힘들어도 참꼬 또 참아야 헌다."고 말씀하시며 가마가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웃는 모습으로 손을 휘휘 젓더니만, 가마가 모퉁이 길을 돌아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뒤돌아서서 옷고름에 눈물을 꼭꼭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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