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 소리
워낭 소리
  • 임 솔
  • 승인 2018.05.0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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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박춘우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집 뒤 공터에 그네를 만들었다. 손자들이 시골 할아버지 집에 오더라도 심심해하지 않도록. 그네 줄에 워낭을 매달아 놔서 그네가 흔들릴 때마다 딸랑 딸랑 소 방울 소리가 울린다. 소 방울은 옛 집을 허물 때 창고에서 발견한 것이다.

6~70년대 시골 농촌에 소가 없으면 살기가 어렵다. 어른들은 농사일이 바빠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소를 먹이는 일은 우리 차지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한여름이면, 한낮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해거름에 소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소들이 싱싱한 풀을 배불리 먹도록 동산이나 언덕, 논두렁, 냇가 등 풀이 무성한 곳을 찾아다녔다. 가끔은 동산에서 소를 매어놓고 궁짓기 놀이를 하거나 순발력이 뛰어난 애들은 소의 등에 올라타 놀기도 했다.

겨울에는 사랑채에 있는 큰 가마솥에 물을 부은 다음 짚이나 콩잎, 고구마 줄거리 등 건초를 넣고 소죽을 끓였다. 소죽이 끓기 시작하면 솥에서 김이 새어 나오면서 부엌에는 녹차 끓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도 녹차를 마실 때면 어릴 적 소죽 끓이던 생각이 난다.) 외양간에 있는 소들은 큰 돌로 많든 구시에 가득 담긴 소죽을 다 먹고 나서 연신 입을 놀려대며 되새김질을 했다. 명절날이 되면 놀고 싶어 형제간에 서로 미루기도 했지만 소죽 끓이는 일은 대체로 내 차지였다. 평생 죽도록 일만 하는 소도 명절날은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다지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소들은 이른 봄이 되면 죽어라 일하기 시작했다. 논이나 밭을 갈기 시작해서 모내기 때는 무논에 들어가 써레질을 했다. 인삼장 꾸미는 일을 할 때면 지주목인 총대나 햇빛을 가려 주는 발 등 무거운 짐을 등에 가득 싣고 가파른 언덕배기를 오르거나 높은 고개를 넘어 다녔다. 가을이 되면 베어 말린 벼를 집안까지 실어 날랐다. 어떤 소들은 장날이면 무거운 짐을 실은 달구지를 끌고 시오리도 넘는 돌멩이가 가득 박혀있는 신작로 길을 타박타박 걸어 읍내에 갔다 와야 했다.

소는 참기 어려운 산고를 겪으며 송아지를 낳고 젖을 줘 송아지를 키웠다. 그렇다고 자식인 송아지와 오붓하게 정을 나눌 시간도 별로 없다. 송아지가 돈이 될 만한 크기로 자라면, 주인이 송아지 목에 밧줄을 매어 장으로 끌고 가는 것을 눈물을 흘리며 무기력하게 그냥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애기가 걱정이 되는지 밤새워 목이 쉴 때까지 ‘음매에~, 음매에~’ 울고 나면 그뿐이다.

소는 아무리 힘든 일을 하더라도 소리 내어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조그만 덩치의 사람이 시키는 대로 그저 묵묵히 일만 하는 바보다. 소는 아무리 아파도 잘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 참을 뿐이다. 소는 나이가 들고 몸이 늙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장에 팔려갔다.

돌이켜 보면 닭과 돼지와 함께 소는 우리의 가족이었다. 새벽부터 닭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꿀꿀대는 돼지 소리, 음매 소리와 함께 딸랑대는 워낭 소리는 짐승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한 집에서 우리 가족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소리 중의 하나였다. 도시에서 도시로 바쁘게 전전하면서 나는 언제부턴가 귀에 배어 있던 고향 집의 소리를 잃어버렸다. 고향에 돌아온 지금도 현대화에 밀려 사라져버린 옛 고향집의 소리가 그립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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