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풍미인’ 삼행시 짓기
[수필]‘풍미인’ 삼행시 짓기
  • 나창호 수필가(前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21.03.01 22: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창호 수필가(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前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前 부여군 부군수)

겨울을 나느라 물에 굶주렸던 풍란들에게 물을 주니 뿌리가 금새 푸르도록 허겁지겁 빨아들인다. 추운 겨울동안은 풍란도 잠을 자야 봄에 튼튼하게 자란다 해서 동짓날 이후부터 물을 매정스레 굶겨왔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스프레이를 해주었지만 물은 일주일 간격으로 조금 씩만 주었던 것이다. 정남향 베란다여서 햇살이 깊숙이 드는데 그동안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오랜만에 흠뻑 물을 주고 나니 풍란 잎에 아침이슬 같은 물방울들이 맺히고 잎들도 생기를 찾는 듯하다. 그동안 햇빛을 많이 받은 금유황(金幽晃)은 잎이 노랗게 발색되어 밝은 모습을 보이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부악(富嶽)도 잎 무늬가 아름답다.

잎 가장자리마다 붉은 복륜을 띄고 있는 홍선(紅扇)에 눈길이 멎는다. 잎에 든 홍외(紅隈)가 이뻐 눈에 잘 띄고 촉수가 많아 풍성한 것이 보기에 좋다. 문득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작년 초겨울께의 일이 생각난다.

내가 본격적으로 풍란을 들이기 시작한 건 작년 초여름께 부터였다. 코로나 여파로 외출을 자제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의고 허전한 마음에 두문불출하던 때였다. 마침 목부작한 풍란에서 하얗게 핀 몇 송이 꽃향기가 어떻게나 좋은지 허허로운 마음에까지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이왕이면 여러 종류의 풍란을 키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화예품, 엽예품, 두엽류 등등의 풍란을 들이기 시작했다. 반려동물이 아닌 반려식물의 입양이랄까? 풍란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다.

한편으로 그때는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던 때라서 풍란을 주로 인터넷으로 구매했는데, 풍란에 대한 지식이 일천해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했었다. 하지만 풍란이 50여 분(盆)을 넘어서자 대충대충 할 일이 아니었다. 수태갈이도 그렇고 물 관리도 그랬다. 자칫하다가는 애써 구한 풍란들을 죽이지 싶었다.

풍란에 대한 상식과 관리 방법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애란인(愛蘭人)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카페에 가입하는 것이 좋을듯해 여러 카페에 가입을 했는데 풍미인(風美人:풍란과아름다운사람들)도 그 중 한 곳이었다. 카페마다 입회비는 없었고, 때로는 난 고수들이 유·무료로 분양까지 해주어 풍란 입양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카페에 가입하고 보니 애란인들이 쓰는 말이, 난을 샀느니 구입했느니 하지 않고 입양했느니 들였느니 하고 있었다. 마치 풍란을 한 가족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초겨울이 되자 풍미인 카페에서 ‘풍미인’을 소재로 삼행시 짓기 행사를 한다는 공지사항이 떴다. 금상, 은상, 동상을 선정해 시상한다고 했다. 11.1∽11.4까지 4일 동안 편수 제한 없이 카페 방에 제출(입력)하면 된다고 했다.

처음에는 회원 수가 7000여 명이나 되고, 날고 기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시큰둥했지만 은근이 시상품이 탐나기도 했다. 밑져봐야 본전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삼행시를 짓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머리를 한껏 짜내 지은 첫 번째 삼행시는 아주 짧았다.

풍: 풍란 꽃향기는

미: 미인의 미소 같은

인: 인생의 활력소

왠지 어설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지난 여름날의 일이 떠올랐다. 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물을 흠뻑 주고 났는데 하필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그치지를 않고 며칠을 계속 오는 통에 여러 분(盆)의 뿌리가 많이 상했던 것이다. 물주기를 소재로 두 번째 삼행시를 지었다.

풍: 풍란이 떼를 쓰며 물을 자꾸 달라 해도

미: 미안한 마음 꾹 참고 제 때에 주어야지

인: 인정에 겨워 마구 주면은 풍란뿌리 썩지요

내가 동상(銅賞)을 받은 것은 아마도 이 두 번째 시이지 싶다. 삼행시를 제출하면 반응들이 올라오는데 이 시의 반응이 앞에 시보다 좋았다. 누구나 한 번쯤 풍란뿌리를 썩힌 경험들이 있는지 “풍란 키우는 교육용이 되겠다”거나 “물주기에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홍선(紅扇)이 동상의 상품으로 내 손에 들어왔던 것이다.

나는 이 풍란을 볼 때마다 즐겁다. 수많은 풍란인들과 겨뤄서 상을 거머쥔 게 어디냐 싶기도 하고, 가을햇빛을 받으면 잎이 붉게 물드는 홍외가 아름다워서이기도 하다.

금상과 은상의 시는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지만 입상자만 발표하고 삼행시는 밝히지 않아서 아쉬웠다. 굳이 알아보려면 4일 동안 수상자들이 제출한 삼행시를 일일이 찾아봐야 하는데, 찾는다고 해도 어느 시가 당선작인지를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만 두고 말았다.

오는 초여름에 이 홍선이 꽃을 피워 청아한 향기를 풍겨주면 좋겠다. 과한 욕심이지만 나도 풍란 꽃 같이 향기 나는 삶을 살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