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운보의 집’ 구경
[수필] ‘운보의 집’ 구경
  •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21.04.20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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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차가 바로 앞의 ‘운보의 집’을 향해 좌회전하는데 오른 쪽 길가 밭둑에 봄비를 맞고 서있는 명자나무 붉은 꽃이 곱다. 푸른 잎과 붉은 꽃잎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아주 오래전부터 오고 싶었지만 여태껏 오지 못하다가 오늘 친구네와 회남로 벚꽃 구경을 나왔던 길에 보은 회인면의 피반령을 넘어 운보의 집까지 내처 온 것이다. 운전대는 늘 하던 대로 집사람이 잡았다.

매표소 뒤 주차장이 의외로 여유롭다. 주차부터 하고 매표소에 들러 “65세 이상은 무료입장이 되느냐?”고 물으니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4명인데 2만원을 받는다. 원래 성인은 1인당 6천원인데 1천 원씩 깎아 주는 모양이다. 매표소 바로 옆에 세워진 엄청 큰 삼각 돌이 눈에 들어와 살펴보니 ‘운보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못한다는 느낌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지금까지 담담하게 살아왔습니다.’로 시작된 말씀은 ‘소음 공해가 심한 환경에도 조용한 속에서 예술에 정진할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내용과, ‘이미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 유감스럽고‘, ‘또 내 아이들과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소리를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면 한‘이라고 이어지고 있었다. 생전의 어느 날에 하신 말씀인 모양이다.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 ‘운보의 집’ 현판이 달린 행랑채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뜰과 ㄱ자 한옥이 고풍스럽다. 뜰에는 덩치 큰 반송들과, 향나무, 모과나무, 자목련 등등 고목들이 많이 서있고, 수령이 오랜 소나무 분재와 수석들도 많다. 수석은 실내에 들여놓고 볼만한 것이 아니라 실내에는 들일 수 없을 만큼 부피들이 크다.

어느 것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석수 같고, 어느 것은 산자수려한 모습을 하고, 또 어느 것은 ‘악기’라는 설명이 붙어있는데 국악기인지 서양악기인지 모르겠다. 집 주변으로 기묘한 수석들이 일부러 만든 돌 받침대나 커다란 수반에 올려 져 있다.

주로 남한강 석이 많았는데 물에서 갓 나왔을 때의 반질반질함이나 매끄러운 면은 볼 수가 없고 물때와 이끼가 끼어 표면이 거칠다. 작은 연못에는 비단 잉어들이 한가롭게 노닐다가 사람 발소리를 듣고 떼 지어 몰려든다. 한가로이 유유자적 하는 모습이 부럽다.

우산을 접고 실내로 들어가니 좌측 마루방 나무침상에 커다란 호피가 한 장 깔려 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호피인데 머리통에 박힌 아래 위 송곳니가 무척 길고 날카롭다. 해 박은 눈이겠지만 호랑이 눈알이 노랗다. 김기창 화백이 그림을 그리면서 호사하며 산 모양이다. 창가에 놓인 죽부인은 더운 여름날에 끼고 잤으리라.

마루 오른쪽에 넓은 작업실이 있다. 전면이 모두 밝은 창으로 되어 있고, 양쪽 벽에는 고가구와 함께 생전에 즐겼을 진기한 기호품들이 보관돼 있다. 그런데 백자는 그렇다 해도 북과 가야금과 거문고는 왜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널찍한 마루방 가운데에 의자와 탁자와 작업대가 놓여 있다.

의자에는 생전에 짚고 다녔을 지팡이가 팔걸이에 걸려 있고, 의자 앞 작은 탁자 위에는 필통에 담긴 붓들과 벼루가 놓여 있다. 문득 탁자 밑에 놓인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소박하다.

맨 앞에 놓인 작업대에 한동안 눈길을 주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흰옷을 정갈하게 입은 노인이 ‘어흠’하는 기침소리와 함께 붓을 들고 들어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 작업대에서 수많은 명작들이 탄생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작업대에서 눈길을 떼고 ‘예수생애특별관’이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니 벽마다 돌아가며 액자에 담긴 그림들이 걸려있다. 예수가 태어나서 승천하기까지 예수의 수난상을 한국화로 표현한 그림들이다.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모습,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 승천하는 모습 등의 그림이 한국 산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인 얼굴에 갓 쓰고 한복 입은 예수의 모습이 낯설면서 이채롭다. 이 그림들 (30점)은 운보가 6.25 전쟁을 피해 부인의 고향 군산으로 내려갔을 때인 1952년부터 1년 동안에 그렸다고 한다. 또 예수의 일대기가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과 퍽 유사해서 그렸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운보의 집을 나와 뒤편에 있는 운보미술관으로 올라갔다. 지팡이를 쥐고 앉아 있는 운보의 동상이 미술관 오른 편에서 전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미술관 앞뜰을 수석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미술관 입구 전면에 있는 어미 양과 새끼 양석부터 무지하게 크다.

운보 동상 옆의 코끼리 석은 실제 코끼리만하지 싶다. 저렇게 큰 돌을 어떻게 실어왔는지 모르겠다. 길쭉한 백경 석은 어린짐작으로 6∽7m는 되지 싶다. 무지하게 길다. 아담한 수석이 아니라 마치 바윗돌 전시장 같다.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수석공원 안내문을 일부 옮겨본다.

‘이곳에 전시된 국내외 야외 자연석들은 오랜 세월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특히 국내 10대 명석 중 코끼리, 모자 양, 여인상, 백경, 명상의 돌 등 총 5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으며, 모두 국보급 수준으로 감히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습니다.’

운보의 집과 여기에 있는 수석만 구경해도 입장료 값은 하지 싶다. 발길을 미술관 실내로 옮겼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왼쪽으로는 운보의 연대기가 두 개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오른쪽으로 관람동선이 있다. 첫 번째 눈에 띈 그림은 붉고 둥그렇게 배가 부른 ‘태양을 먹은 새“다. 그림이 크지는 않지만 원체 유명한 그림이라서 직접 보는 감회가 깊다.

다음은 1만원 지폐에 사용되고 있는 세종대왕의 영정그림이다. 지폐와 달리 붉은 용포를 입은 모습이 한결 밝고 의젓하다. 1975년도에 한국은행의 의뢰로 가로 85cm 세로 120cm 비단에 수묵채로 그렸다고 적혀있다.

또 하나 ’조국통일‘이라는 대작이 눈에 들어온다. 아랫부분에 만개한 무궁화 꽃이 가득하고 녹색으로 백두산 천지를 그린 그림인데 한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웅장하다.

이외에도 독수리, 군마도, 청록산수, 수렵도 등등 주옥같은 그림을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

바로 옆의 우향관에서는 부인 박래현의 작품들과 운보의 동생 김기만 화백의 그림을 관람할 수 있었다. 운보의 그림이 대부분 대작인데 비해 우향의 그림은 아담한 사이즈고, 우향의 그림 중에는 김후란, 이상로 같은 시인의 시를 곁들인 시화와 무희들, 석류 그림이 좋아 보였다.

북한에서 그린 김기만의 ‘태양을 따르는 한마음’은 수백 마리의 참새가 태양을 향하거나 날아드는 병풍그림인데 우상화의 냄새가 짙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붉은 매화꽃이 만발한 ‘홍매’그림은 순수해서 좋았다.

다시 운보관으로 나와 연대기를 보려는데 먼저 눈에 뜨는 것이 사후에 추서된 금관문화훈장이다. 훈장증과 훈장이 같이 놓여있다. 생전에 받았으면 더 좋았으련만, 사후라도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싶다.

운보는 1914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초등학교 때 장티푸스를 앓아 청각을 잃었다고 한다. 운보는 어머니의 권유로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하에서 미술수업을 시작했다 한다. 이후 수많은 걸작들을 남기고 2001.1월에 별세한 것으로 연대기가 마무리 되고 있었다. 연대기는 매표소에서 받은 리플렛을 나중에 자세히 볼 요량으로 대충 훑어본 것이고, 특별전을 보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운보가 그린 미인’ 그림들과 박종화의 삼국지, 김팔봉의 군웅, 최인욱의 임꺽정 등등 50∽60년대 신문 연재소설 삽화와, 베트남 전쟁 종군 스케치들이 전시되고 있어 색다른 느낌이 들었지만, 시간이 없어 건성건성 본 것이 좀 아쉽다. 그새 집사람과 친구네는 후딱 둘러보고 나갔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조각공원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와 일행과 함께 미술관 우편의 야외에 별도로 조성해 놓은 조각공원으로 갔다. 조각공원 안내문에는 ‘국내 유명작가들의 보기 드문 초대형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하는데 몇몇 작품들만 건성으로 보고 말았다.

조각에 큰 관심이 없고 이해도 어려워서다. 다만 작은 연못을 조성하고 연꽃들이 심어져 있는 독특한 정경이 정겹다. 연꽃향이 은은한 날 연못가에서 친구와 앉아 술 한잔하면 좋겠다싶은 생각이 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운보와 우향의 합장묘를 보러가자고 하니 다들 싫다고 한다. “그럼 나만 잠깐 갔다 오겠다‘ 하고 연못 약간 위 오른편에 있는 묘소입구로 올라갔다. 철도 폐 침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놨다. 묘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합장묘의 전면이 바로 아래의 조각공원 쪽을 향하고 있다. 운무 때문에 전방이 훤히 보이지는 않는다. 봉분 앞 돌벽에 붙인 오른쪽의 작은 돌판을 보니 우향은 운보 보다 26년 먼저인 1976년 1월 2일에 타계한 것으로 새겨져 있다. 이로 보면 운보가 꽤나 오랫동안 홀로 산 것이다.

반대편 작은 돌판에는 구상 시인의 추모시가 새겨있는데 운보의 생애를 잘 표현한 것 같아서 옮겨본다. 제목은 ‘우리미술의 금자탑’이다.

‘하늘의 섭리런가/ 일찍이 청각을 잃으시고/ 오롯이 한평생을/ 만물의 진수眞髓를 그려/ 이 나라 고유미술의/ 금자탑을 이뤘네/ 체구는 장대하나/ 숫되기가 소년 같아/ 만나는 사람마다/ 허울을 벗게 하니/ 가시매 그 예술 그 인품/ 더욱 기려 그리네

나는 묘소자리의 좋고 나쁨을 보러간 게 아니라서 곧 되짚어 내려 왔고, 곧 운보가 부인과 사별한 후 어머니의 고향에 집을 짓고 말년까지 예술 활동을 했다는 내수읍 형동리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문 닫을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언제 조용히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은 나만 드는 것일까? 단풍이 고운 가을에 또 한 번 올까? 혼자의 생각일 뿐 다른 사람에게 굳이 묻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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