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침햇살과 풍란 기르기
[수필] 아침햇살과 풍란 기르기
  •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21.07.0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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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나창호 수필가

우리 아파트는 정남향이다. 바로 앞 동과 오른쪽 옆으로 앞 뒤 두 동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면 햇살이 아파트 앞 동과 바로 옆 동의 뒤 벽면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해가 아파트 뒤편 동북쪽에서 뜨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집에는 아침 햇살이 들지 않는다.

우리 집 앞 베란다에 햇살이 직접 비치기 시작하는 건 11시나 거의 되어서다. 그것도 베란다 안으로 깊이 드는 게 아니라 난간 대에 살짝 걸터앉는 정도다. 그러다 점점 안으로 비쳐드는데 넉넉히 잡아야 한 뼘 반 정도 넓이가 최대치이다. 이렇게 들어온 햇살도 오후가 되면 점점 베란다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데 오후 3시쯤 되면 다시 난간 대에 걸린다. 해가 동북쪽에서 떠서 남쪽 하늘을 돌아 서북쪽 하늘로 옮겨가기 때문인데, 해의 고도가 원체 높아서 베란다 안쪽으로는 빛이 들지 않는 것이다.

가끔 해가 어디 쯤 떠있나 하고 베란다 바깥 창문을 열고 목을 길게 늘여 올려다보면 아파트 꼭대기에서 남쪽으로 겨우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 떠있다. 그러니 아파트 앞 벽면을 환히 비춘다 해도 베란다 깊이 빛이 들 리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햇살이 베란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지 않으면 덮지 않고 얼마나 좋으냐고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여름철 햇살이 겨울철처럼 거실까지 깊숙이 들면 무더위를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정이 있다. 베란다에서 풍란과 석곡 같은 화초를 키우기 때문이다. 아침 절의 햇살은 식물에게 보약과도 같다. 아침햇살은 오후처럼 뜨겁지도 않지만 맑아서 풍란에게는 보약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 나는 아침햇살이 베란다 안쪽까지 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자꾸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우리 아파트 뒤편에 있는 여러 동의 아파트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이 아파트들은 방향이 동남향이어서 아침 해가 뜰 때부터 앞 베란다로 햇살이 깊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햇살이 들면 풍란 키우기에 얼마나 좋을까 싶은 것이다. 또 이 동들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나 식물이나 여름나기에도 좋지 싶다. 하지만 그저 부러워만 할 뿐이지 어찌해 볼 도리는 없다. 우리 아파트의 방향을 틀수도 없고 뒤쪽 아파트로 이사 갈 수도 없다.

베란다 안쪽에 놓인 화초들이 한동안 -춘분에서 하지로 오면서 햇살이 점점 베란다에서 사라져갔다- 햇살을 받지 못한 탓에 잎들이(간접 햇빛을 받아 극심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거무튀튀한 녹색을 띠고 생기가 없는 것을 봐도 햇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아끼는 난들과 화초들이 이제부터는 희망을 가져도 좋지 싶다. 춘분에서 하지로 올 때는 햇살이 점점 사라졌지만, 이제 하지에서 추분으로 갈 때는 햇살이 비록 굼뜨긴 해도 점점 더 찾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엊그제 벌써 하지가 지났으니 이제는 해가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고, 고도도 하루하루 낮아질 게 분명하다. 마침내 추분 때가 되면 해가 정 동향에서 뜨고 아침햇살도 베란다로 찾아들 것이다. 이후로 해가 동지를 향해 가면서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면 햇살도 더 깊이 들게 된다. 이리되면 햇살에 굶주렸던 풍란과 화초들이 생기와 활력을 되찾을 것 아닌가.

나는 그동안 내 나름의 풍란관리 대책(?)을 마련해서 시행해 왔는데, 앞으로도 당분간 (베란다에 햇살이 충분히 들 때까지) 시행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사실 그동안 군자란이나 긴기아난, 해피트리와 벤자민고무나무 같은 것은 나중에 햇살이 제대로 들 때 기운을 차리라고 제자리에 두고 볼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지만 내가 아끼는 풍란에 대해서는 별도 관리를 해왔다.

말이 대책이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창 쪽에 바짝 붙여 놓은 풍란 대에 일정 수의 풍란 화분들을 교대로 옮겨 놓아 직접 햇살을 받게 하는 일이다. 강한 빛을 필요로 하는 풍란은 기간을 좀 더 길게 하고 중간 빛을 필요로 하는 풍란은 기간을 짧게 하는 일일 뿐이다. 약한 빛을 좋아하는 풍란은 제자리에 그냥 놔둔다. 무슨 철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충 어림짐작으로 하는 일이고, 더구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큰 어려움은 없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풍란에게 햇볕을 직접 쬐어 주어야 튼튼한 뿌리와 튼실한 천엽을 내고, 새끼 촉을 잘 달뿐 아니라 꽃대도 잘 올리기 때문이다. 또 색화(色花)를 피우는 풍란은 햇빛을 많이 받아야 화색이 짙은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매일매일 시시때때로 살펴준 때문인지 풍란들이 꽃대를 제법 올렸다. 흰색, 녹색, 붉은색, 노란색 꽃과 꽃 모양이 색다른 기화까지 피었거나, 피고 있어 즐거움을 안겨준다. 백운각, 서출도, 금루각, 라사홍룡, 흑악, 홍현, 황화, 춘급전, 비취, 청해 등등. 이것이 풍란을 키우는 재미 아닌가 싶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비연이나 자대사 같이 일찍 피었다가 지기 시작한 꽃들이 더러 있어 아쉽긴 하지만 아직 피어 있는 꽃들이 여럿이고, 피어나는 꽃들도 제법이어서 이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7월까지는 꽃향기로 더위를 견딜 수 있지 싶은 것이다.

어둠이 내릴 때부터 한동안 풍란 꽃의 달달한 향기를 맡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어떤 때는 화분을 손에 들고 꽃들을 보면서 향내를 맡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란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 세상에도 꽃처럼 향기 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풍란 꽃 같이 향기 나는 사람은 되지 못할망정 역겨운 냄새가 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한다고 다짐해본다. 풍란을 키우면서 역한 내를 풍기는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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