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나창호] 호두강정과 기분 좋은 술
[수필-나창호] 호두강정과 기분 좋은 술
  •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 승인 2021.12.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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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 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 군수)

나는 평소에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가끔 따분한 생각이 들거나, 왠지 기분이 울적할 때나, 반대로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혼자 술을 들기도 하는데 내가 무슨 술중독자라서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또 혼자서는 많은 양을 마시지도 않는다.

오늘도 좋은 안주가 있어 기분 좋은 술을 집에서 홀로 마시고 있다. 좋은 안주는 경주 지역의 유명호텔 셰프(chef)가 직접 만든 호두강정이다. 그제께 호텔 셰프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오늘 제조한 호두강정을 내일쯤 받을 수 있게 우체국 택배로 보냈다”는 말을 전해줬다.

호두강정을 미리 만들어뒀다가 보내면 맛이 덜하다면서 당일에 만들어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맛있게 들면서 좋은 주말 보내라는 말을 곁들이는 셰프의 마음 씀씀이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그 호텔 셰프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고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인데도 마음씀씀이가 그리 고왔다.

그 택배는 어김없이 어제 도착했다. 어제 외출에서 늦게 돌아와 (부재 시 약속 장소인) 계량기함에 보관된 택배를 찾아 뜯어보니 호두강정 두 캔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넣어뒀던 것인데, 오늘 바깥 날씨가 잔뜩 흐리고 음산한데다가, ‘미세먼지가 많으니 외출을 자제하라’는 안내문자까지 와서 집에 있던 참에 따분한 생각이 들어 호두강정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다. 호두강정이 바삭하면서도 고소하고 달착지근하다. 맛이 고급스럽다. 일류호텔 셰프의 솜씨답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호텔 셰프에게 호두강정을 받은 데는 사연이 있다. 풍란을 통해서 셰프와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지난 월초부터 풍미인(풍란과 아름다운 사람들) 카페에서 온라인 전시회와, 풍미인 삼행시 짓기 행사가 열렸었다.

겨우 작년 여름부터 풍란 기르기를 시작한 나는 온라인 전시회에 출품할만한 품격의 풍란이 없어 풍미인 삼행시만 몇 편을 제출했는데 그 중 한 편이 (금·은·동상도 아닌) 아차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행사에는 애란인(愛蘭人) 고수들이 제공한 풍란이나 고급 풍란분, 특정 물품 같은 협찬품으로 시상을 하는데, 아차상의 상품이 호두강정이었다.

행사운영위에서 수상한 사람은 시상품을 협찬한 사람과 서로 연락해 상품을 주고받으라고 해서 카페 명단의 채팅창을 통해 셰프와 서로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셰프도 풍란을 키우는 고수였던 것이다. 내가 카페에서 ‘남녘바람’이라는 닉네임을 쓰는데, 셰프의 닉네임은 ‘풍란에 빠진달’이었다.

풍란에 푹 빠질 만큼 풍란을 좋아한다는 닉네임 아니겠는가. 카페에서는 줄여서 풍빠달님이라거나 달님셰프라고들 부르고 있었다. 호두강정 맛들을 많이 보았는지 그 맛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고들 말했다. 그동안 그만큼 협찬을 많이 해 왔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호두강정에 자꾸 손이 간다. 막걸리도 더 마셔진다.

나는 풍미인 삼행시 짓기에 인연이 많은 것 같다. 작년에도 삼행시 짓기로 동상을 받아 풍란(홍선) 한 분(盆)을 상으로 받았었다. 다음은 작년 보다 더 잘 짓겠다고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차상에 그친 올해의 입상 시다.

"풍란 꽃향기가 바람결에 은은하니

미인의 향취인가 좋은 기운 가득 하네

인생길 살맛나는 동반자는 풍란 꽃 일세"

애란인들의 시 짓는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지 싶다. 참고로 올해는 작년과 달리 입상 시를 모두 발표했기에 금상 수상작을 올려본다. 은상 수상작은 귀촌 후 풍란농장 경영을 희망하는 시인데 산문은 아니라도 제법 길고, 동상은 ‘인생에 풍란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뜻으로 필자 시와 대동소이해서 생략한다.

"풍요로운 난정으로

미소 짓는 웃음꽃이

인연을 맺어 행복합니다."

짧으면서 애란인의 생활상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도 악인이 있을 리 없겠지만, 하물며 풍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 있겠는가. 사실 애란인들은 정이 많고 부드럽다. 어떤 애란인들은 수시로 여러 종류의 풍란을 입문자들에게 무료로 분양해 주기도 하고, 유료분양의 경우에도 전문점의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분양을 해준다.

또 서로가 난을 교환하기도 하고, 서로 잘 아는 경우는 좋은 품종을 난정으로 주기도 한다. 그래서 풍란을 인연초라 부르기도 하는데 풍란으로 인연을 맺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풍란으로 인연을 맺다 보면 미소도 나오고 웃음꽃도 피기 마련이다. 나도 무료분양과 유료분양을 받아본 일이 있는데 여러 종류의 풍란을 확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풍란만이 꼭 인연이 되겠는가. 맛 좋은 호두강정과 막걸리를 먹다보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리 시상품이라지만 어찌 호두강정을 받아만 먹고 입 닦으며 그냥 있을 수 있으랴. 내게는 답례로 보내줄만한 고급의 풍란이 없으니, 비록 졸작일지라도 글쟁이의 자작 수필집 한권과 엊그제 출간한 시집 한권을 보태서 답례로 보내줘야겠다. 소포에 기재된 주소를 따 놓았으니 월요일인 내일 우체국에 나가 부쳐줘야겠다. 오는 정에는 가는 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셰프가 책자를 받고나서, 내가 호두강정 맛을 즐기듯 글맛을 즐길지 어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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